시어머님의 어머니 이야기
나는 몇 년 전에 20년 간의 며느리 생활을 마쳤다. 시어머니, 며느리... 이제 내 인생에 없는 키워드이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까 절대로 시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어머님이 은근 아들을 바라셨지만 신께서 내게는 아들을 점지해 주지 않으시고 딸만 둘 품게 하셨다. 요즘 시어머니들은 며느리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 며느리 파워가 그만큼 세졌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시어머니들이 그만큼 교양 있으시다는? 암튼...
우리 어머님은 양평 아낙네였다. 양평에서 태어나셨고, 자라셨고, 양평 분이셨던 아버님을 만나 결혼하셨으니 완전 양평 토박이셨다. 물 맑은 양평을 지날 때면 어머님은 늘 양평 구석구석마다 추억이 서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어머님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시할머님이신 그분의 이야기도 자주 해주셨다. 듣고 보면 시할머님은 영락없는 시어머니의 포스를 가지신 아주 고약하신 분이셨다. 나는 한 번도 뵈온 적 없지만,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무서운 할머니 셨음이 분명했다. 우리 어머님은 남들이 아무리 고약하다 해도 친정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 고약하게 할 리가 없으셨던 거지.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정말 고약한 이야기를 알아버렸다. 코로나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즈음, 우리는 시어머님의 동생이 살고 계신 양평에 인사를 갔다. 코로나 기간이라 모두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어른들께 추석 인사를 다녀왔다. 시외삼촌은 다정다감한 분이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산딸기 할아버지’라 부르며 좋아했었다. 산딸기를 마당 가득 심어 놓고 산딸기가 열릴 때쯤이면 자녀손들을 불러 산딸기 체험을 시켜주곤 하셨다. 그뿐인가? 용돈도 항상 챙겨주신다. 아이들이 다 자랐고 함께 동행하지 않았어도 잊지 않으신다. 곱게 봉투에 담아 건네시며 아이들에게 전해 주라 당부하셨다. 외삼촌은 어머님과 닮으신 면이 참 많다. 특히 어머님처럼 외삼촌도 이야기를 조곤조곤 즐겨하신다. 인사를 가면 늘 이야깃거리가 끝이 없으시다.
오늘 글의 주인공은 외삼촌의 아내이신 시외숙모님과 나의 시할머님 이야기다. 시외숙모님은 음식을 영 못하신다. 결혼 후 몇 번 찾아 뵈었지만 음식을 맛나게 먹은 기억이 없다.
고약한 시어머님 아래 음식 못하는 며느리라니...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이미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은가? 아마도 외숙모님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다가 시집오신듯했고 순풍순풍 자녀를 낳으셨으니 식구는 대 식구였다.
어느날 시할머님께서 외출하시고 젊은 며느님만 홀로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단다. 그 산골로 라면과 먹을거리를 파는 장사꾼이 들어왔고 며느님이 큰 맘먹고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할 요량으로 라면을 구입하셨다고... 그 시절은 라면만으로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음식이라 국수를 섞어서 끓여 먹었던 시절이다. 그만큼 라면조차 귀했던 시절이었다. 라면을 사놓은 며느님은 가족들과 함께 할 감사한 식탁을, 맛있게 먹을 자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마나 행복하셨을지...
그런데 우리 시할머님, 이 며느님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으셨단다. 외출에서 돌아오셔서는 허락도 없이 라면을 샀다고 대노하셨단다. “라면에 국수를 섞어서 끓여 얼마나들 잘 먹었을 것이냐”며 팔순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안타까워하시는 외숙모님의 눈가를 보니 그 시집살이에 한스러운 원망의 세월이 스친다. 그나마 자상하신 외삼촌이 계셨으니 그 세월을 견뎌내신 듯…. 시할머님께서 노발대발하신 건 며느리 군기 잡으실 요량이셨던 거 같지만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허락도 없이 물건을 구입했다는 것이 이유? 우리 시할머님 요즘 시대에 계셨더라면 며느리 여럿 잡으셨을 터. 이제 생각하니 우리 어머님이 그분 닮지 않은 것이 내게는 참 행운이었다. 대가족의 끼니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도 안 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그날 시할머님은 그 라면을 불에다 넣고 다 태워버리셨단다. 정말 고약하신 분. 그 라면이 불타는 모습과 시어머님께 야단맞는 며느리가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시집살이… 그 이유없는 갈등을 나는 졸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