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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Jun 17. 2021

기찻길에 떨어진 아기

모든 역사가 되는 추억

음력 2월 중순, 아직 겨울바람이 차갑기만 하던 늦겨울 어느 날이다. 생후 1개월도 채 안된 아가를 안고 앳된 새댁 하나가 기차에 오른다.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여, 대한민국 여자라면 이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몸조리를 해야 하는 때다. 특히 찬바람은 산모에게 금물인데 지금 그녀는 산후 3주 된 그 여린 몸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1997년 한여름에 아이를 낳았던 나는 화장실 가기 위해 맨발로 마룻바닥을 잠시 디뎠던 이유만으로도 발바닥에 찬바람이 들어와서 몇 년이나 고생을 했었다. 그런데 1965년의 산모는 산후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 찬바람 맞고 서울역에 서 있다.




전라도 아가씨가 군인 남편에게 시집 가 주거지를 남쪽 에서 북쪽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은 직업 군인, 이 새댁은 지금으로 치면 전업 주부였던 셈이다. 그러다가 첫 아이를 낳았고 한 달 만에 친정아버지의 기일을 맞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탈상은 유교사상 투철한 동방예의지국에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일.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가며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갈 참이었다. 함께 서울역까지 온 이 부부는 서울역 호남선 앞에서 헤어지고 만다. 남편은 군용 칸을 이용했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새댁은 홀로 아가를 안고 민간 칸에 타기로 한 것. 요즘은 동반 할인제도가 있는데 그 시절에는 없었다. 남편과 헤어진 새댁은 복잡한 서울역에서 기차를 잘못 타고 만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군용 칸에 오른 후 아내와 아기를 찾으러 헤매인다.

기적 소리를 울리며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그때, 승차권을 확인하던 역무원은 기차를 잘 못 탄 난감한 현실을 새댁에게 알려준다. 혼자 타는 기차도 처음이고 서울이란 곳도 처음인 새댁은 역무원의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아마도 그 시절, 기차를 타는 것은 지금의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절차가 결코 만만치 않다. 아마도 새댁에게 기차는, 지금의 비행기를 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 테고 게다가 잘못 탔다고 하니 새댁의 머릿속은 온통 이 기차에서 어서 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새댁은 아기를 품에 안고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철로 사이에 떨어진 이후 이내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가물가물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깨어보니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철로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아기는 오랫동안 칭얼칭얼 울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엄마는 아기를 보호하려고 몸을 굴렸을 테고 아기는 얇은 포대기에 쌓인 채 엄마 품에서 겨우 살아 있었던 거지. 겨우 정신을 차려 낯선 그곳을 빠져나와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휴대폰은 물론 공중전화도 없던 그 시절이었다, 대전역에서 기다리던 남편은 또 어땠을까. 밤새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에서 아내와 딸을 찾느라 아마도 십년감수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표현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 무뚝뚝한 군인 신랑은 그 맘고생 몸고생 한 새댁의 마음을 어루만져나 주었을지... 수척한 모습으로 재회한 이 부부, 남편을 만난 새댁은 또 실신을 했단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늦겨울 스산한 서울역, 열차에서 떨어진 신생아는 바로 나였던 것. 팔순을 넘기신 엄마가 틈만 나면 들려주시는 이야기다. 철길에 떨어졌지만 살아서 이 좋은 세상을 본다시면서 말씀하실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지시는 울 엄마다. 아기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고, 그 분은 분명 천사였다고, 엄마는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믿고 계신다. 만 가지 상상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이산가족이 되었을 수도... 아니면 나만 겨우 살아 어느 고아원에서 자랐을 수도...

이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의 언저리에서 청년시절을 보내셨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 나게 젊음을 살아내신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다. 효도를 실천하시면서 가장으로서 도리까지 지켜냈던 1900년대 중후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엄마의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짠하다 못해 아린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살아남아 오늘을 맞는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 우리 엄마는 아픈 곳이 많지만 여전히 건재하시다. 엄마가 들려주시는 어릴 적 이야기는 나만의 역사이다.


사진출처 manuel-schinner-349153-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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