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장병 위문품
집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촌동네,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나올 것만 같은 곳에서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며 가족을 지키며 삶을 지켜 나갔다. 군인 아저씨들 틈에서 자란 나에게 군인 아저씨들은 늘 어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뻘인데도 한동안 나에겐 그들이 “군인 아저씨”였다.
어릴 적 나의 친숙한 색깔은 국방색이다. 멋지게 말하면 카키색, 다크한 올리브그린이다. 어린 시절, 눈만 들면 앞산 뒷산이 온통 초록 초록했고 우리 집 옷걸이에는 국방색 군인 옷만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린 컬러에 끌렸던 것. 좋아하는 컬러를 물어보면 보라나 핑크라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골라 쓰는 색은 주로 그린 계통이었다.
그시절 우리 집에는 군용 물건이 많았다. 덮고 자는 이불도 군인 담요, 간식도 군인 건빵에 군인 통조림 등. 나는 건빵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내 남동생은 좋아했다. 함께 전쟁놀이하던 시골 또래들에게 나눠주며 어린 어깨를 으쓱하곤 했다. 그런 우리에게 엄마는 건빵을 기름에 튀긴 후 설탕에 굴린 고소하고 단맛 나는 간식을 종종 만들어 주셨다. 우리 집엔 모든 것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린 내게 딱히 부족한 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의 웃픈 경험이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학생이었던 나에게 선생님 말씀은 곧 법이었다. 요즘에는 없어졌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국군장병 위문품이라는 것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군인들에게 위문 편지와 물품을 보내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분필로 또박또박 목록들을 적으셨고 말 잘듣는 어린이인 나는 그 목록들을 모두 가져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집에 있는 것은 챙기고 없는 것은 구입해야 할 상황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시골 가게에 있는 품목들을 하나씩 샀어야 했다. 울 엄마 아빠도 학부모는 처음이라 당연히 모르셨을 터. 아마도 우리는 그 품목들을 구하러 시골 읍내를 돌아다녔지만 다 채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 모든 물건을 빠짐없이 준비해 갔더니 선생님 말씀, “너는 군인 가족이라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하셨다. 선생님도 어리바리한 나를 보시며 난감하셨을 것이다.
직업 군인이신 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 때 전학만 11번,
한 학기에 한번 꼴로 전학을 다녔다.
어느 날은 살던 집에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이사한 새 집으로 “학교 다녀왔습니다”를 하면서 하교한 적도 있다.
그런 나는 일러스트가 아주 예쁜 소녀소녀한 감성의 동화를 좋아했는데 곧잘 멍 때리고 앉아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가기를 잘하는 결코 심심할 줄 모르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다. 그날도 수업시간에 멍때리느라 선생님의 말씀을 놓친 모양이다. 분명 “이 중에서 한 가지만 가져오세요.”였을 텐데 전부 다 가져오라는 것으로 입력한 것이다. 별로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이것은 드물게 남아 있는 웃픈 경험이다.
그때는 위문품만 걷는 것이 아니었다. 늘 국군장병께 위문편지를 썼다. 우리가 해마다 모으는 위문품과 편지는 아마도 랜덤으로 다른 지역으로 보내져 주로 사병들에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꼬마인 나는 아주 열심히 식상한 내용의 편지들을 썼을 것이다. 날씨와 건강기원 등의 내용을 적었겠지. 좀 조숙했더라면 재미있는 내용을 적었을 텐데. 그러나 어린 나는 상상과 현실의 간극을 자유롭게 넘나들지는 못했다. 그때 나의 세상은 너무 좁았으니까.
그래도 나는 편지를 잘 쓰는 어린이였다. 심지어는 대통령께 편지를 써 보낸 적도 있었고 비서실로부터 답장을 받은 나만의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다. 그러니 더러 답장을 보내주는 국군장병도 있었다. 아마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불꼬불 써 내려간 식상한 글이었을지라도 어린 여동생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박수가 아니었을까?
추억을 반추하노라니 그때 그 국군장병들은
이제 이 나라의 보호를 아낌없이 받으며 노후를 잘 살아내고 계실지 궁금해진다.
사진 mario-caruso-xzU8CFWFdSg-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