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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Jun 23. 2021

아직도 살림이 낯선 아줌마

나이가 들면생각은 많아지고 몸은 따로 놀고

살림은 결코 만만한 일 아니네요

"나는 전업주부가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않아, 조만간 전업주부가 될 날이 도래한다. 조금 두렵다. 열정이 샘솟아 일이 바쁘기만 하던 40대에는 살림도 만만히 생각했었다. 언젠가 살림만 할 기회가 오면 두렵지 않게 할 수 있을 듯... 나의 오만을 깨닫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는 요리를 안 하면서도 요리 까짓 껏... 세상이 만만했다. 스마트한 사람들은 30대에 세상이 만만한 듯한데 느리게 터득하는 나는 40대가 그랬다. 지나고 보니 자신감은 나이와 상당히 비례하는 거였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러거나
"아직 늦지 않았겠지?" 하면서 겸손해진다.

세상이 슬슬 두려워진다. 이쯤이면 자신감도 하락세... 생각해보니 이러는 이유는 욕심에 있었다. 뭔가를 이루고자 하거나 얻고자 하면 나의 상태를 진단하게 되고 무모함의 거품이 빠질 나이가 되면 자신감도 잦아들어  우리 집 강아지처럼 몸을 말아버린다. 머리도 집어넣고 다리도 품속으로 말아 넣어 동그란 공처럼 움츠린다. 아...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지는 거였다.


주말이 되어 시간이 좀 할랑해지면 냉장고 문을 열고 찬찬히 맨 위칸부터 스캔을 해본다. 모처럼 주말이니 그래도 남편 밥상은 차려줘야 하는데 나의 냉장고 안이 이토록 낯설 수가 없다. 나는 여자인가 아닌가. 나는 주부인가 아닌가. 나는 아내인가 아닌가. 냉장고를 열 때만 해도 주부 코스프레를 하려고 잔뜩 벼르고 열었다가 냉장고 안을 스캔하고는 멘붕상태가 되어 있는 반찬이나 꺼내고 있는 꼴이 라니... 야심 찬 메뉴는 금세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처럼 익숙한 메뉴로 바뀌어 있다. 좀 근사한 밥상은 언제나 차린담?


색다른 메뉴를 하려면 이웃(네이버)에게 물어야 한다. 주중에 보았던 유튜브 메뉴도 나의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졌다. 뭔가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서 남편을 대접하고 싶으나 간절한 마음에 비해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그렇게 만들어 식탁에 내면 남편은 맛있으면 많이 먹고 맛없으면 적게 먹는다. "님아 그 강을 거너지 마오"의 할아버지랑 닮았다. 76년을 함께 정겹게 살아간 노부부의 이야기의 뭉클한 사연을 보면서 나는 왜 그 대사에 꽂혔을까 말이다. 할머니가 음식을 만들어 할아버지께 드리면서 맛있냐고 물으신다. 오래간만에 음식을 만들면 남편이 음식을 먹어보기도 전에 맛있느냐고 채근하는 나랑 닮았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저만치 앞섰으나 영 행동이 시원찮다. 결국 스마트폰을 검색한다.


그러고는 "드시고 싶은 걸로 주문하세요." 이런다. 아이고...
시부모님께서 안계시기에 망정이지...


요리도 자꾸 해야 늘 텐데 가끔 하니 재료 사용도 서툴고 어색하다.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지만 그 다음번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 금세 곰살곰살 만들어 한상 뚝딱 차리는 요리 고수들은 나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 주말에 "언니, 국수나 말아먹게 오세요." 하던 아는 동생이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 국수 만들어 주는 사람을 제일 좋아하는 남편이라 나도 국수는 가끔 한다. 나는 김치말이 국수를 종종 만든다. 김치만 있으면 되니 좀 만만하다. 그러나 우리를 초대한 아는 동생네 국수는 나와 차원이 다르다. 숙성의 최적화된 상태의 새콤한 물김치와 국수의 면발은 쌀국수라 붇지도 않았고 먹는 내내 쫄깃한 식감을 그대로 유지했다. 깻잎을 넣은 야채 부침개는 반죽의 농도와 굽는 온도가 알맞아 바싹하고 쫀득함이 어우러진 겉바속촉이었다. 남편은 두 그릇을 뚝딱 한다. 후식으로 나온 갓 구운 크루아상에 시금치 바질 페스토는 얼마나 건강한 고소함이었는지...


나의 냉장고는 팔순 엄마가 담가 주신 김치 종류,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계절 과일들, 장은 봐놓고 아직 조리되기를 기다리다가 유통기한이 가까워 오거나 지나갈 찰나에 놓인 식재료들이다.

유일하게 내가 만든 것은 피클뿐이네... 오늘은 그나마 피클이라도 있어 체면 유지되는 나의 냉장고지만 언젠가는 곰살스러운 주부의 냉장고를 꿈꾼다.



사진

photoholgic-LS9tOOiAzwE-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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