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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

애정의 첫째 자리

by 사나래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나 자신이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거울을 본다. 나를 향한 나르시시즘, 자기 연민이 넘치고 넘친다. 그럴듯하게 나를 포장한다. 살아온 날들이 때론 부질없는 면류관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유대의 큰 부자이며 높은 지위의 관원이었던 장래 유망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자신을 향해 어느 정도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었던 거 같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믿으며 이만하면 영생도 탐내볼 만했었겠지. 아마도 그는 자기 삶의 완벽한 만족을 위해 채워야 할 단 한 가지는 영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는 인간적 측면에서 마땅히 갖춰야 할,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할 것을 다 갖추고 있었다.

특히 가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부족한 것.... 나는 지금껏 그것이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나름 재물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단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한 그의 확언으로 청년의 성실함을 아셨다.”(소망, 519)고 했다.

이제껏 나름대로 너무나 잘 살아온 인생이었다.



삶의 우선순위

그렇다면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거의 완벽하다시피 그는 많은 것을 갖추고 있었다. 깊은 감동을 하며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재물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주께서는 “있는 것을 다 팔아”라고 하신 것이다. 일부만 팔아서 생색만 내라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는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생활의 염려가 발목을 잡고 있는 오늘 나의 모습 속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한지 묻는다.


문자 그대로 재산을 탈탈 털어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것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고 있었다.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그에게 높은 지위와 재산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할 만큼 신앙심도 남달랐으나 그의 문제점은 삶의 우선순위에 있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지도 하에 두지 않았던 것, 구주와 연합하지 않았던 것,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으나 세상이 좀 더 우선순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 청년에게 정말로 부족했던 딱 한 가지는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그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청년과 예수님 사이에 안타까움이 흘렀다.

그때 돌아섰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하게 희생할 수 없었고, 그러기에 그의 재물이 주는 유익은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그는 슬퍼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그는 명민해서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다 알면서도 결국 세상을 택했다.


여기서 그가 놓친 것은 주께서 제시하신 영생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다 가진 그가, 그런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으면서까지 그토록 갈망했던 영생이었건만 그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것의 가치를 깨달을 수 없었다.


“세상이 그의 애정의 첫째 자리를 차지한 동안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선물의 시여자보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더 사랑하였다.” (소망, 522)


그는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보다 그 선물의 가치에 더 연연한 것이다. 그래서 현세의 유익에 더 집착하고 더 사랑하였으므로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청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주님은 온전한 순종, 실제 생애로 증거 되고 나타나는 품성, 나의 애정의 첫째 자리를 원하신다. 세상을 또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기준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렸다. 이 못난 나를 언제까지 최고로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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