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 오늘도 충분합니다
어느 날 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의 이름이 정. 말. 로.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아마도 가명인 듯. 읽어보니 지방의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람이었다. 손글씨로 꾹꾹 눌러 한 글자씩 써 내려간 3장이나 되는 참회와 감사의 내용이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보기 드문 아날로그 손편지를 받았다. 조금 소심한 겁쟁이인 나는 반가움보다는 호기심 이면에 두려움이 섞인 철렁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출판사에서 북디자인을 하는 내가 독자의 편지를 받을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한 잡지에 연재를 시작했는데, 나의 글을 보고 독자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신기했다. 어떤 분은 글을 매웁게 쓴다고도 하고 또 다른 분은 인사이트가 있는 글이라고도 했다. 때로 밥을 사주시겠다는 독자분도 계신다. 내 글에 공감을 하신다는 그분은 내가 한사코 거절함에도 불구하고 80의 노구를 이끌고 자가운전으로 지방에서 올라오시기까지 하셨다. 이런 난감한 경우에는 매우 불편하고도 어려운 식사 자리이지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뵙는다.
그러나 비싼 음식을 사주셔도 음식의 맛도 모르고
어깨만 무거워져서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는
송구하고 감사한 한 끼의 식사였다.
전화로 용기를 주시거나 문자를 보내주시는 귀여운 할머니 독자들도 계신다. 내 글이 알음알음 알려져서 많은 분에게서 반응이 나타나는 중이다. 특히 연세 지긋하신 분들의 따뜻한 반응이 감사하다.
글이라는 게 불특정 다수를 향한 어쩌면 허공을 향한 울림 같지만 쌍방향 소통이다. 무거운 책임감도 동반한다. 보는 사람 없다고 듣는 사람 없다고 아무렇게나 글을 써 내리지 말아야 한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충분히 다듬고 또 다듬어서 발행해야 한다.
요즘같이 SNS가 활성화된 시대의 소통은 쌍방향이 필수. 소통의 가닥을 잡지 않으면 일방이 될 가능성은 높다. 이를테면 민감한 독자의 반응에 대한 주목과 이용자의 의견 수렴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요즘은 온, 오프라인의 작가나 언론사 등 글을 발행하는 입장에서는 독자 의견 수렴을 위해 백방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나도 조금씩 그러는 중이다. 디자인만 할 때에는 몰랐던 새로움이다.
독자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종이책의 글이든 SNS 글을 접하고 각자의 마음 상태에 따른 감동과 공감을 한다. 공감에 대한 표현도 각양각색이어서 댓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지만 좀 과감한 독자들은 작가에게 실제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런 용감한 독자들이 있는 반면 소통을 시도하고 싶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안타까운 독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자유롭지 않은 중에 소통을 원하는 경우, 즉 최근에 내가 받은 교도소에서 온 편지가 그것이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억울한 죄, 고의적인 죄, 실수로 저지른 죄 등 다양한 이유로 수감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내가 만드는 작은 잡지가 희망을 주는 듯싶어 만감이 교차했다. 뿌듯하면서도 어깨가 무거워지며 두려움도 깔린 그런 감정이었다. 아마도 나의 독자는 참회의 감정 속에 수만 갈래의 생각들이 향방 없이 흔들거렸을 것이다.
삶에 대한 의미와 무게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비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금 더 일찍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더라면,
멋진 인생을 설계하는 데 돈이나 권력 명예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알려줄 이를 만났더라면,
아니면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글을 읽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나도 수만 갈래의 안타까움들이 흔들거렸다.
또박또박 적어 내려 간 손글씨로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와 회한이 뉘우침과 희망으로 반향 되어 적혀있었다.
내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중죄를 지은 건지 살아 있는 동안 자유로운 사회의 빛을 다시 볼 수 없을듯한 절망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꿈꾸게 하는 중차대한 성격의 글을 과연 내가 쓸 수 있을까. 아마도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글의 통로로 삼으신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며 숙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모두가 납득하고 공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안다. 독자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치는 이런 글들은 공감으로 자리한다. 아무렇게나 지르고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것이 아니므로 글 쓰는 자들의 지속적인 숙고가 필요하다.
세월이 흘러 네트워크의 어느 귀퉁이에서
또 어떤 새로운 독자와 만나 사랑에 빠질지
결별을 할지 모르는 늙지 않는 불로 장생이 글이다.
작가가 지워버리거나 차단하지 않는 한 지속되는 울림이다.
이번에 받은 교도소에서 온 편지는 나에게 그런 울림이었다.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며 자신만 의지하고 살아가느라 버겁고 힘겨운 인생, 때로 헛디디며 걸어가는 삶, 나둥그러져 절망의 늪에 갇히기도 하는 폭폭 하고 고단한 인생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 글의 힘, 그 놀라움, 그 울림에 감사한다.
삶, 그 자체가 고단하고 힘겹게 느껴지고 혼자서 책임지기 버거울 때를 위하여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을 찾게 만들어졌다고 하니 살다가 살다가 신을 찾고 싶은 상황이 오면 드디어 든든한 후원자의 후광을 입는 행운아로 거듭나는 순간임을 눈치채야 한다.
터진 웅덩이로 달려가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쉬움 가진 사람들,
좌절된 희망으로 남모르는 슬픔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고도 갈증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을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으로 인도해
갈증을 해갈하는 게 글이 주는 울림이지 않을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숙제를 풀어보려 한다. 내가 받은 그 사랑... 오늘도 충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