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쩌면 유다?
유다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마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접하는 순간,
유다의 배신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은 유다를 나쁜 사람이라고만 단정 짓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거기에는 결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
나는 그렇게 될 리 절대로 없다는 단호한 우리의 속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충분히 우리도 유다일 수 있다.
유다처럼 교만하고 우러름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나서서 살림을 책임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어느 줄에 서야 내 인생이 꽃길을 걷게 될지를 계산한다면 말이다.
나에게 이로울 사람을 가늠하여 그렇게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유다를 닮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감춰두었던 저 밑바닥에서
자신은 그렇게 존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 일을 감당하기에 넘치는 사람,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람이라는 교만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이 교만은 겸손의 뒤에 가려져 잠자코 있다.
그러다가 기회가 오면 순식간에 나를 지배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 어부나 세리였던 것과는 달리 유다는 지식과 명예를 갖춘 자였다.
그저 우러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했더라면 세상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 이전에
죽었으면 좋을뻔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모두 제자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누구나 만남을 시작하거나 일을 시작할 때는 목표가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희망을 품었다.
그분을 만남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희망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에게서 느끼는 평안이 그들을 희망으로 이끌었다. 유다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희망을 품었다. 제자들과는 다른... 그는 예수님을 통해 인생 제2의 도약을 꿈꾼 것이다.
그는 더 높은 자리가 탐나서 예수님 곁에 남았다.
그분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고, 성과가 있는 일에 집중했고,
자신의 학식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예수님 곁에서 눈에 띄게 일을 했다.
이런 유다에게도 순간순간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부심이 더 강했다.
유다에게 내세와 영원은 가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의 왕인 예수에 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켰고
자신은 거기서 더는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똑똑한 유다로의 입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래 따라다니기만 한 어리석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베드로... 그는 침착하지 않고 성정이 급해서 생각 없이 사고만 치는 사람이다.
요한...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들을 주워 담에 전하기에 급급한 사람이었고
세리였던 마태는 지나치게 정직하여서 오히려 배포가 작고 계산적인 사람이라 단정 지었다.
유다가 보기에는 다들 답답하고 무능할 뿐이다.
유다는 제자들 틈에서 늘 잘난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대놓고 드러낸 것은 아니다.
아주 겸손하고 성실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교만을 포장했던 것이다. 교회나 직장에서의 우리들처럼....
종종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우리는 유다일 수 있다.
유다처럼 남들이 하는 일은 하찮게 여기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비중을 두어 평가한다면 우리는 이미 유다이다.
봉사를 하고서도 자신의 수고를 계산하려 들고 자신의 몫을 챙기고 있다면 우리는 유다이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명분을 내세워 남도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유다이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으로 망해가는 회사도 일으킬 것 같다면,
교회를 살릴 묘안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이미 교만이 그득하기에 주위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만은 내가 공을 들이고 세심하게 계산하고 있는 것과 달리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나갈 때 튀어나온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진 향유 옥합을 쏟아붓는 그런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다.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행위에 주목하지 않고 돈을 먼저 보았다.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텐데,
그 돈이면 교회 건축에 보탤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어떤 곳에 지원금을 보낼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본인의 그럴듯한 구제사업 계획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 정도의 옥합을 살 돈이라면 자신의 재정 능력을 미루어볼 때,
훨씬 가치 있는 곳에 그 돈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면 말이다.
유다는 자신의 동료들보다 훨씬 우월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임받고자 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에 점점 취해갔다.
예수님 곁, 어리숙한 제자들 틈에서 유다는 고고한 자태로 높임 받으며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더욱 높아져 갔고 더욱 탐욕스러워져 갔고
이대로라면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셨을 때 이인자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을 굳혀갔다.
이렇게 유다는 사탄이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으로 자신을 준비시켜 나갔다.
그런 유다였기에 종의 자세로 낮추어 헌신하고 봉사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구세주가 아님에 실망하였고
끝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서 일을 냈다.
예수님이 유다를 참아준 이유는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의 품성의 결함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해 주셨다.
봉사를 통하여 이기심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기에 제자들 중에서도 중요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러나 유다는 봉사를 하면서도 자신의 수고비를 챙겼다.
수고의 대가를 이 땅에서 이미 계산했기에 그의 봉사는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유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인 건 제자들뿐이 아니었다.
유다는 예수님조차도 못마땅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대범한 까닭은 그의 인생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학식과 그간의 명예와 살아왔던 경험으로 예수님을 알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예수님 곁에 있으면
더 높은 출세의 길이 열릴 것이고 부와 명성을 얻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기대를 엇나갔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종의 행위를 하고자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신 그 순간,
유다는 그의 꿈을 접어야 할 위기를 감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였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겠다는 결론이 선 것이다.
예수님을 좇으며 그가 꿈꾸던 부와 명예와 권력이 순간 날아갔다.
제자들의 발이나 닦아주는 그분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의 기대는 헛된 꿈이 될 것이었다.
마음을 접었다. 이제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고 자신의 계산법에 확신했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교육 기관에서 충분히 배웠고 그의 노력으로 좋은 직장까지 얻었었다.
정말로 운이 좋게 신앙도 받아들여 예수님의 제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가치 척도는 세상에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그저 그의 몸뚱이일 뿐이었다.
끝까지 영의 것을 분별하지는 못했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세상을 뒤집어 놓으시면 좋으련만
그분은 세상의 왕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계셨다.
이렇게 해서는 새 나라의 이인자가 되기는 어럽다는 생각이 유다를 지배 했다.
이토록 유능한 자신을 예수님은 늘 인정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믿어주면 사업에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향상될 거라 그는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유다의 생각에 못 미치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분을 가르쳐야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 그분께 수치와 고통을 드리는 것이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확신이 섰다.
유다는 그 생각을 키워나갔다.
자신의 관점에서 점점 합리화시켜나간 것이다.
유다에게는 높은 학식과 그의 지혜와 경험이 그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면서
경험을 스승으로 삼아온 습관 때문에 인생 망친 경우이다.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도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 늪에 갇힌 모습이...
어쩌면 내 모습이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봉사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목도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날의 예수님의 거룩한 행동은 이 열한 명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위로받을 수 있었다.
모두가 유다 같지 않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이제 유다의 생각은 현실이 된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고 그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르고 유다는 그것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예수님을 적들에게 파는 배신을 하면서도 똑똑한 유다는 그것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잘못된 길로 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결코 모른다.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대부분은 거기서 돌아선다.
끝까지 가겠다고 배짱부리는 이는 몇 안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온 마음을 다해 유다가 돌아서기를 애원하고 암시를 주셨지만
유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유혹은 아무리 훌륭한 인품과 학식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과의 사이에 방해물이 될 뿐이다.
허리를 굽혀 종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배우지 못한 열한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봉사의 학교에서 배울 수 있었다.
낮아져야만 진정 높아질 수 있다는 배움을 우리는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까.
예수님이 유다를 제자 삼으시고 구원을 위한 중책을 맡기신 것은
유다에게서 버릴 것과 고쳐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직분을 과용했다.
늘 예수님의 곁에서 그분을 지켜보았음에도
그는 자신의 구주를 폭도들의 손에 팔아넘길 계획을 한 것이다.
사랑하는 척하면서, 겸손한 척하면서, 열성 있는 척하면서 결국에는 우리 구주를 팔았다.
유다에게 더 이상의 개혁은 없었다.
예수께서 그토록 바라셨건만 유다의 결함은 더 이상 고치지 않았다.
유다는 제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업을 하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전지적 세계관으로 우리와 유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유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면 자신과 유다와의 다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유다와 나의 다름은 시선의 고정에 있다.
눈을 예수께 돌리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결코 눈을 맞출 수 없다.
예수님과 눈을 맞춘다는 것은 예수님의 설득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분의 선하신 눈빛을 경험한 우리는 고집부려 내 갈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교만하여 거친 인생길로 내 발이 향할 때,
예수께서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을 느낀다면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눈물 주르륵 흘리며 예수님께 나를 맡기는 것이다.
꼭 이것만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을지라도, 내
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 아무리 멋질지라도,
내 인생에 예수님 없다면 나는 유다와 같은 사람일 테니까.
유다는 가야바의 법정에서 끝내 자신이 기대한 바와 다른 길,
고난의 길을 선택하시고도 유다를 측은하게 바라보신 그 눈빛을 보기는 했다.
유다는 대제사장과 폭도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드라마틱하게 신의 아들이심을 드러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랬다. 원수들을 한방에 물리치실 비장의 무기가 발현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폭도들이 퍼붓는 모든 욕설을 묵묵히 참고 계시는 것을 마침내 유다는 보았다.
그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양심의 가책이 그를 짓눌렀다.
드디어 그는 참을 수 없어서 가야바에게 이 무죄한 사람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이미 가야바도 이성을 잃었고 이 엄청난 범죄를 속히 해치우고자 했다.
유다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스스로 목숨을 구하시라고 간청했다.
후회를 했다. 두려웠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돌이키고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안 순간 유다는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명을 오판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랬다 할지라도 후회가 아닌 회개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사도 요한과 예수님이 목청껏 외쳤던 회개 하라고 외쳤던 그 말, 그가 그것을 깨달았더라면 어땠을까?
회개는 죄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죄를 짓고 벌에 대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죄책감에 눌려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한 벌 때문에 하는 후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무게에 눌려 다시는 그것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정죄와 심판이 두려웠을 뿐이다.
그렇게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고, 보고, 경험하고 가끔 깨닫기도 했던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인생이 끝났다. 세상 불쌍한 사람이다.
유다의 비참한 최후가 나의 것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따라다니느라 고생만 하고, 봉사하느라고 헛된 수고만 하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세상 불쌍한 유다의 모습은 먼 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나와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억압과 핍박과 고통을 당할 때에 그대를 위하여 생명을 준 그토록 큰 나의 사랑을 기억하라”(DA, 659).
* 이 글은 「Desire of Ages」 Chapter 70th, 76th을 읽고 묵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