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메시아, 나의 메시아
나는 어떤 예수님을 기대하였는가.
내가 만난 분이 나사렛 예수가 맞을까.
내 생각대로 내 기준대로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나의 예수님을 진정 만났는지 스스로 묻는다.
유대인들은 외적으로 과시해 보일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의 적을 물리쳐 주실 분을,
그들의 신분을 180도 상승시켜 주실 분,
그래서 현재의 가난한 삶을 구원하고 병든 몸까지도 강하게 해 주실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나랑 다르지 않다.
나도 유대인처럼 죄에서도 구원하고 삶에서도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은근히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작 메시아를 만났을 때 유대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준에서 원했던 분이 아니었으니까. 억울했다.
그래서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것이다.
그들의 기대에 턱없이 부족한 기대 이하의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고 갔다.
최근 십자가에 관한 고증이 곁들여진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방송용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시청자의 흥미를 끌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전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처참한 고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커다란 십자가 형틀을 만들 만큼의 큰 나무들이 없었고
십자가형을 집행해야 할 죄수들은 너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예루살렘의 십자가는 어른 팔뚝만 한 굵기의 나무를 두 개씩 겹쳐서
플러스 모양의 십자가가 아닌 엑스자 모양의 십자가였다고…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커다란 십자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예술작품과 그림의 십자가는 다만 작가들의 상상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십자가형은,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하여 고안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참형의 방법이었으며 로마인들은 그들의 권력과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참혹한 십자가형을 500년이나 지속하였다. 세월이 흘러 십자가형의 잔인함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하자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에 대해 한동안 입에 담지 않고 금기시했다고…. 우월감에 가득 찬 로마인들에게 그것은 흑역사였을 테니까. 잔혹한 십자가형에 대한 로마의 기록은 모두 몰수되어 사실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로마 주변국의 고고학적 자료만으로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죄와 무관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그런 방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인간의 존엄은 완전히 무시된 채,
그리고 사망하기 전까지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이렇게 대접했다.
인류와 하나 되고 구원을 위하여 선택하신 고난의 길을 그저 묵묵히 가신 분께 대한
이 얼마나 기막힌 대접인가.
“유대인들은 외적으로 무엇인가를 과시해 보일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압도하는 의지의 섬광으로 사람들의 생각의 사조를 변화시켜서 당신의 최상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메시아를 기대하였다.”(DA, 702)
자신들의 기준으로 기다렸던 메시아,
그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이렇게 대접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혹, 나는 내 기준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내 기준에 맞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며 나도 유대인들처럼 그러지 않았을까?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신의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았는지 결코 모른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도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지 않은 모든 순간에 그랬다.
원수들의 죽음을 선고하실 수 있었던 그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내 기준대로 그분을 평가했던 모든 순간에 그랬다.
그리고 자신을 높였던 모든 순간에 그랬다.
나는 나의 예수님을 얼마나 대접하고 있는지, 부지중에 십자가로 내몰지는 않았는지 조용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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