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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한 순간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사람들

by 사나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 일 때문에 내가 힘들어진다면, 그 일로 인해 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말이다.

도망은 아니더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 것이다.

‘사람이니까’라는 이유로, 이해도 되고 용서도 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는 신성이 아닌 인간과 똑같은 조건에서도 우리와 같지 않으셨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과 해야만 하니까 하는 일이 있다. 그 "해야만 하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책임이 있다. 피하고 싶어도 사랑이 우선된다면 그 사랑하는 존재를 위하여 나를 넘어가게 된다.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
그 희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그분도 두렵고 떨렸다고 한다.
사탄도 예수의 죽음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 잔을 피할 수 있는 선택권도 여전히 예수께 있는 상황이었단다.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이 가련한 예수를 뒤흔들었다. 그때 인간 예수는 나보다 20~30년은 젊은 나이였다.

이제 그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도 싶으셨을 것이다. 너무나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었으리라.

그동안 병자도 많이 고치고 이적도 베풀었고 우둔한 사람들을 많이 가르치고 외로운 자들을 많이 위로했으니까, 이만하면 되었을 그 위기를 충분히 피하실 수도 있었다.


능력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참아 주는 것과
무능해서 참아야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예수님은 참아주신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참아내고 계셨다.


그런데 한편, 같은 상황에서 그분 앞에 보였던 사랑 한다고 공언하던 제자들의 행동을 우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 선생은 제자인 자신들과 인류의 구원을 선택하신 분이라는 것을 배웠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함께한 몇 년 동안 수도 없이 들었고 배웠을 테니...

그런데 이 딱한 인사들은 저희 생명을 스스로 구원하겠다고 극한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려오는 가련한 그들의 선생을 버리고 모두 도망한 것이다. 그토록 강하고 담대하셨던 분이 기절할 만큼 연약해졌을 하필 이때 말이다. 곁에 있어 그분을 위로했어야 할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안위를 염려하셨던 분.

자신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어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셨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인류의 운명을 홀로 감지하신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선택하셨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시 있을까...


자애라는 표현으로도, 희생이라는 표현으로도,
그 어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그 순간조차도 인간을 가엾다고 여기신 분이다.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저 없이 인류의 구원을 선택하신 분이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그 순간에 그분을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로와 격려를 아낌없이 퍼부었어야 할 제자들은 이제 그분 곁에 더는 없었다.

3년 반을 예수와 동행하고 동고동락하면서 지냈건만 제자들은 구원의 놀라운 계획과 예수님의 사명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그 밤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비록 큰 고통 가운데서라도 제자들의 연약함을 용서하신다. 예수께서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DA, 689)

예수께 힘이 되었던 존재는 늘 함께했던 제자들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와 천사들이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기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나였으며 안 그랬을 거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적어도 나는 제자들과 같지는 않았을 거라 확신하며 착각에 빠진다.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았던 많은 순간이, 우리도 제자들처럼 도망하는 순간이었음을 우리는 자주 간과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여 스스로 살길을 찾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십자가의 길을 목도하였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내시는지를, 십자가 죽음의 그 순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고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경험은 훗날 간증으로 나타났다.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은 필드에 나가서 그 경험을 간증하면서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순교였다. 자신들의 배신과 예수님의 용서의 경험은 그들이 충분히 순교할 수 있을 만한 경험이었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결말을 이어주셨던 것이다.
우리도 가능하다.

비록 그동안 자주 도망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났던 소중한 경험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낼 것이다.

매일 말씀을 읽던 경험이 위기를 침착하고 평화롭게 대처하고 만들어 주며 악을 저항하는 힘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어떤 억울한 상황이 오더라도 예수님만큼은 아닐 테니까...


홀로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지는 말아야겠다.
오늘도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그분을 뵙기 위해
그만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사진-frank-mckenna-140054-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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