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처럼 살아보기
천사가 감방에 들어가니 베드로가 누워 있는데 전적인 신뢰의 평화스러운 잠을 자고 있다(The Acts of the Apostles, 146)
내일 죽을 날을 잡아 놓고 ‘전적인 신뢰의 평화스러운 잠’이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나는 어제 이 의미를 생각하느라 밤새 잠을 설쳤다. 요즘 말씀을 읽어도 들어오지 않고 무엇을 위한 바쁨인지도 모를 나날들을 살았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과 내 행동은 늘 따로국밥이었다. 그러니 읽은 말씀들은 점점 나와 멀어지고 그 사실을 알기는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헤롯 아그립바(A.D. 37-44년 팔레스타인 통치)가 야고보를 처형시키고 이어 베드로를 투옥하여 사형 날짜를 받아놓고 승승장구하던 때이다. 죽기 바로 전날, 지하 바위 감옥에서 베드로의 양손은 사슬에 매어 있고 양옆에는 옥졸들이 지키고 있다. 옥 문밖에도 물론 파수병이 버티고 있었으며 옥문은 든든히 잠겨 있었다. 첫째 문과 둘째 문, 셋째 문까지 단단히 잠겨 있었고 문마다 파수병이 지키고 있었으니 천지 개벽이 없는 한 탈출과 구출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 와중에 죽을 날을 내일로 받아 놓은 베드로가 잠을 자고 있다. 불안 속에 잠 못 들어야 마땅할 밤에 전적인 신뢰의 평화스러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가? 그는 전적인 신뢰 속에서 가능했다고... 어떻게 해야 베드로가 누렸던 전적인 신뢰가 가능할까?
베드로는 항상 수다스러웠고 성격도 급한 편이었고 그래서 낙심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호기심이 많았고 그러는 반면 의심도 많았다. 그는 또 갈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구주를 확신하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을 버리고 화끈하게 돌아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방끈도 짧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았던 영광스러운 경험이 바로 그의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겪었던 수많은 경험이 그를 죽음의 코앞에서도 평화로운 잠을 이룰 수 있게 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건져올렸던 경험, 예수님 덕분에 유일하게 물 위를 걸어보았던 경험 같은 거 말이다. 우리는 한 번만이라도 그런 경험을 한다면 베드로보다 더한 평화도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베드로는 애초부터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고 베드로에게 이런 특별하고 부러워할 경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어느 정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선생을 외면하고 부인했던 돌이킬 수 없었던 실수도 있었다. 그 자신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고 판단된 그 순간, 그는 원망의 눈빛 대신 용서하시는 구주의 눈빛을 경험하게 된다. 그 후 그가 인생을 걸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하고 처절한 나락으로 곤두박질치지만 그는 용서의 눈 맞춤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다시 일어난 그는 구주께서 사흘 만에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것도 목격한다. 게다가 한없이 자격 미달인 자신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부활하신 구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특별한 분부도 받는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는 구주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는 경이로운 모습을 목도하였으며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의 말씀도 확실하게 들었다.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배신의 아이콘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눈 맞춤으로 평생 평안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하고야 만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실수한다. 믿음의 대선배셨던 아브라함도 모세도 엘리야도 그랬고 세상 것을 다 가졌던 다윗과 솔로몬도 그랬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마찬가지... 특히 이분들이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쳤을 때 주로 넘어지곤 했던 것을 우리는 듣고 보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만났기에 오늘 우리의 모본으로 남았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다윗 등은 시대가 달랐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험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수백년 전 그들의 경험을 공유해 주신다. 신구약을 통틀어 그들이 실수했던 포인트를 미리 우리에게 알리셨고 사탄의 집중 공격을 받는 타이밍도 알려주셨다. 넘어지는 순간과 또 어떻게 하면 일어날 수 있는지도 이제 우리는 안다. 그러니 내일 죽을 날을 잡아 놓았다 할지라도 ‘전적인 신뢰의 평안한 잠’이 들었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