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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억울한 그대

억울함을 삭이는 예수님의 방법

by 사나래

진실과 오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정도는 바로 알아야 한다.

만약 알 수 없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이 확신에 차서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를 늘 여쭈어야 한다.

옳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옳은 줄 알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 배경에 여지없이 자아와 교만이 있다.


우리의 바쁘고 향방 없는 시간 중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 시간은 여지없이 우리를 교만에 올려놓고 흔들어댄다. 마침내 우리는 저마다의 생각을 의지하다가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하면서 끌려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기만으로 빠져든다.

그것은 같은 상황에서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다른 반응으로 나타난다.

즉,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십자가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안나스와 가야바, 빌라도, 헤롯, 성난 군중들 그리고 멀찌감치서 바라보았던 제자들까지...

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아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지만

어쩌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일조했던 안나스와 가야바, 빌라도나 헤롯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존심에 굴복당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은 했으나 인정하지 않았다.

성령의 음성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권위에 맞게 그 일을 지시하고 처리했다.

어쩌면 그들 나름의 명분에 합당한 일을 했던 것이다.

당시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을 의심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들마저도 멀찌감치에서 그분을 지켜보며 십자가 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사람들도

이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확신에 찬 외침으로 배신에 가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인기와 순간의 감동에 흔들렸던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의 곁으로 자원해서 왔다가 스스로 떠나갔다.

그러나 그분은 이 상황을 한 방에 날려 인기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야 하는 상황, 나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무능해서 당하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시다.

잔인한 폭도로 변한 유대인들을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셔도 쓸어버리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걸 끝까지 참아내셨다.


자기를 위해서는 어떠한 이적도 행치 않으시며 오직 이 세상에 오신 한가지 사명,

초림하셨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인내를 하신 것이다.

쓰러지고 기절하시면서까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더 큰 사명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인류의 구원에만 집중하신 그분께는 다른 관심이나 육체적 고통도 방해가 될 수 없었단다.


“그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고 수많은 사람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셨다”(DA, 753).


십자가 곁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위치에 있으면서도
죽어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그분의 사명에 동참하여 때로 그 일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십자가 곁에서 멀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보다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만약 억울해 못 견디겠다면, 참자니 화병이 날 것 같다면 이것을 기억하자.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먼저 생각해보고 그러고 나서 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참아질 것 같다. 이것은 사명 아닌 일을 하면서 억울함을 참아내는 것과 다르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함께하면 우리는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확신은 사명이 될 것이다.

십자가 곁을 지켜내는 것이 사명인 많은 사람이 그분의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홀로 외롭게 두었던 그 일이 이제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는 예수님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다.

우리도 그렇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두가 구원에 이르지는 않았다.


가끔 받는 감동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십자가 곁을 지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matteo-grando-G-sOvCHxaDE-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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