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분을 몰라보았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하지 말자.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미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도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견주어
부족함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순간들이 이미 우리에겐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를 향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남을 향해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순간들은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 세 사람,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무수한 사람들 중
그분을 알아보았던 오직 세 사람의 고백에 주목한다.
예수님을 모질게 대하며 갈보리까지 끌고 갔던 로마 백 부장이 그중 한 사람이다.
명령에 의해 명령을 위해 거기 있었지만 그에게는 십자가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는 축복이 임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예수님의 마지막을 유심히 지켜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식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기 고집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면 식별이 더딜 수도 있다.
우리가 세상에 강하게 주장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분을 식별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도 못 알아보고 진리도 모른 채 강하게 신념을 주장했던 제사장과 관원들의 전철을 우리만큼은 밟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그분에 대한 정보가 넘치도록 많지 않은가.
우리 곁에 쌓이고 쌓인 말씀들... 쌓아만 두지 말고 이제는 펼쳐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그동안 그분이 수고한 것을 보게 되었다는 말씀이 매우 놀랍다.
그러나 절망은 아직 이르다.
이제 막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들이 열리기 시작한 거니까.
한편 강도도 하나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았고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키레네(구례네) 사람 시몬도 그분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또 있다.
시몬... 그가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지는 않았다는 것.
로마 군인들이 그를 지목하였을 때 그는 자원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마지못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를 지며 수치감이 온몸을 휘감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이제는 예수가 아닌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
매우 견디기 힘든 순간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는 고집이 그토록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에 그것을 짊어짐으로 그는 예수를 모실 기회를 얻었다.
그에게 십자가를 질 기회가 왔을 때 새로운 길도 함께 열린 것이다.
그는 섭리로 이끌림을 받았으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고
가까이에서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십자가를 져야 할 바로 그 순간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
때로 힘들고 남의 눈총이 따갑고 수치심이 극도에 달할지라도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순간이라면
기꺼이 또 즐거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한 사람은 십자가 형을 집행하면서,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 형을 당하면서,
또 한 사람은 십자가를 대신 지면서 그 마지막 순간에 은총을 입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순간은 이들뿐 아니라 자연계에도 또 많은 사람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아침에 저들이 가졌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DA, 770)고 한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 일어난 변화였다.
이 사건을 지켜보던 제사장과 관원들…. 안타깝게도 그들은 같은 사건을 지켜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결코 변하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간의 지식과 유전이 그들을 속박했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면서도 그들은 고집과 자기주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누구를 탓하리오.
십자가 곁에서 하나님의 아드님을 알아본 세 사람의 고백은,
평생을 배우고도 깨닫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세상 안타까운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은총을 입은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고 온 몸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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