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을 기억하며
병약하신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6년을 더 아버님을 모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실 무렵 아버님의 치매 증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어머님도 이유를 모르셨을 것이다. 영감이 나를 골탕 먹이려고 저런다고 투덜거리셨고 우리는 늘 그렇게 사시던 분들이라 그러려니 했다. 결혼하고 보니 아버님과 어머님은 알콩달콩한 부부 사이는 아니셨다. 아버님은 본래 말투가 다정다감하신 편이셨는데 유독 어머님께만 툴툴거리셨다. 톰과 제리처럼 두 분은 늘 아웅다웅하셨고 두 분 사이는 늘 전후의 냉전 상태처럼 싸늘한 기류가 흘렀다.
어머님은 소녀 감성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어머님은 아버님 치매 때문에 병이 악화되어 먼저 가신듯하다. 아버님의 치매 초기 증상을 전해 주셨을 때 우리는 믿을 수 없었다. 치매가 처음 시작될 때 곁에 있지 않으면 마치 거짓말을 듣는 것 같다. 어머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 지 내가 직접 겪어보고야 가늠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치매 가족의 삶으로 그렇게 걸어 들어갔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아버님 시중은 고스란히 내 차례가 되었고 드디어, 치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밤이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들어오시는 아버님 때문에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오신 아버님은 나가는 문을 찾지 못하셨다. 발걸음 소리가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우리 몰래 밖으로 나가시는 일도 많았다. 밤새 어디를 헤매고 다니시는지 날이 밝아 기억이 돌아와야만 집을 찾아오셨다. 한 번은 남의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오해받아 경찰서에 가신 적도 있다. 이것은 얌전한 시작이었다.
아버님은 한밤중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밥상을 차리셨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당시 나는 세상의 소리가 멈추면
그때부터 나한테만 들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 이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깨어 상황을 보니 식탁 위에 밥그릇의 숫자가 족히 열 개는 넘었다. 먹을 사람이 많다고 하셨다. 아마 아버님의 식솔들을 다 기억해 내신 모양이다. 아들, 딸들, 손녀들... 이런 상황들이 매일 버라이어티 하게 펼쳐졌다.
아직까지는 얌전한 상태. 급기야 위험 수위에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출근한 어느 날, 가스레인지 불을 켜놓고 잊으신 거다. 집안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연기가 위층으로까지 올라간거다. 퇴근을 하니 윗층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건을 수습하신 일을 일러주시는데 죄송하고 난감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말없이 얼굴만 쳐다보았다. 출근할 때 밸브를 잠그는 것으로 잠시 수습했다.
아버님은 치매 약을 꼬박꼬박 시간 맞춰 드시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모두 출근하고 나면 낮에는 아버님 혼자 계셨는데 약을 먹었는지도 기억할 수 없게 되신 거다. 약만 제시간에 드셨더라도 그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듯이 “아버님! 약 드셨어요?” 여쭈면 “그럼. 먹었다.” 역정을 내시는 바람에 증세가 점점 악화된 것이다.
어느날 아버님은 내가 보는 앞에서 냉장고를 화장실로 착각하신 행동을 하셨다. 그날 나의 충격은 나를 정신 못 차리게 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형제가 없다 보니 아버님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일단 벌어진 상황을 남편이 급히 수습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배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찬양 시간에는 눈물이 아닌 울음이 터졌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폭풍 속에 나는 갇혀버렸다. 밤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고 이명은 나를 종일 시끄럽게 하는 중이었다. 나의 판단은 건강하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 그 즈음에는 회사의 일도 산더미였다. 매일 야근을 해야 겨우 일을 마무리할 만큼 회사는 바쁘게 돌아갔었다. 나는 일도 아버님도 내 삶도 감당이 안되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날 나는 펑펑 울면서 인생 끝난 사람처럼 교회를 나왔다.
상담전문가이신 은사님께서 치매는 건강한 가정을 깨트리는 병이라 치매 가족은 국가에서 보호하는 거라며 어떻게 그리 오래 집에서 모실 수 있었냐고 하셨다. 시설에 보내드리는 것이 불효가 아니라는 말씀이 우리 부부의 가장 큰 부담을 덜어주었다. 요양원에 있는 친구도 나를 위해서 빈자리를 확보해 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와줄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손만 내밀면 되었는데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며 그렇게도 힘든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서로서로 돕고 위로하며 함께 사는 세상이었는데 더디게 인생을 배우는 나는 또 몰랐더랬다.
아버님은 시설에서 케어를 받으며 3년을 사시고는 떠나셨다. 떠나시는 날, 아들도 딸도 아무도 기억을 못 하시면서도 “아버님! 저 알아보시겠어요?” 했더니, 힘주어 마지막으로 “며느리”라고 하시며 그렇게 떠나가셨다. 삶의 끝에서 애증의 며느리를 기억해 주셨다. 살가운 표현을 그렇게도 못하셨던 분이 며느리한테 만큼은 아니셨던 거다.
사람이 자신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기억의 한편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일상이 뒤죽박죽 되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지워지는 삶, 내가 누구인지를 서서히 잊어버리는 것, 그것만은 제발 비켜가기를 소망한다. 내가 살아온 모든 기억을 다 안고 그렇게 나는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