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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May 25. 2023

백수의 성장법 (feat.ChatGPT)

나를 찾기 위해 밥줄 끊고 빤쓰런한 썰

 

일단은 퇴사를 했다.

일 년여를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세워둔 대책은 얕은 잔고뿐. 아니 대책이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이제 뭘 하고 싶으신 건지?!'


-부터 알아내야 했다. 내 안의 엄격한 심판관인 초자아는 내 퇴사결심을 방해하던 일등공신이었고, 당연히 고운 눈초리가 아니다. '자 이제 멀 어쩌겠다는 건지 보자!' 하고 팔짱을 낀 채 비아냥 거린다.


 왜 일을 그만뒀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일단 일이 괴로웠다. 가르치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고, 아이들과의 교감이 부담스러웠다. 한마디로 적성에 안 맞았던 것이다. 맞지도 않는 일을 왜 10년 넘게 했냐면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처음엔 일을 익히느라 몰랐다. 플레잉과 티칭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 나는 레슨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했고 자연스럽게 경력이 쌓였다. 학원, 대학, 엔터를 거치며 계속 혼자 일을 했기에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하지만 예고레슨을 시작하면서 다른 선생님들을 만나고 이야기해 보니 다들 적성에 안맞는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건 아니란 사실이 확실해졌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가르치는 게 재밌어서, 사람 만나는 게 좋아서' 하다못해 ’ 아는 척하는 거 좋아해서‘ ’가르치려 드는 성격이라 ‘ 등 내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마치 이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조건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의 발표회에서도 그런 선생님들은 리액션이 달랐다. 마치 BTS라도 온 듯 엄청난 함성으로 제자들을 격려했고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의 성취감이 눈에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감정에도 동의할 수가 없으니 일에 대한 회의감만 늘어갔다. 애써 아닌 척 일하다 보니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이런 내가 선생질이라니, 애들한테는 나보다 더 좋은 진심까지 지닌 선생님이 필요해' 하는 이타심을 가장한 도망칠 궁리가 시작됐다.


 또 다른 이유는 성장이었다.

비록 일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오랜 코칭으로 경험이 축적되어 코칭스킬에 부족함이 없었다. 경력이 쌓이며 노하우가 늘어나니 일은 더 많아졌고 아이들의 실력은 당연하다는 듯 향상되었다. 점점 그 일이 뻔하고 지겨웠다. 입시곡에 넌덜머리가 나서 점점 음악 자체를 듣지 않게 되었다. 지각 한번 한적 없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정체된 나 자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레슨좀비가 된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1,2,3학년을 가르쳐서 실력을 향상시키고 대학에 보내도 쉬지 않고 고등학교 1,2,3학년이 채워졌다. 지옥의 고딩루프 속에 갇혀 복식호흡만 100만 번 가르치고 있자니 현타가 왔다. 솔직히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이 부스스스- 하고 사라지는 기분...


 그래서 개인 작품활동도 열심히 했고 결과물도 냈다. 하지만 레슨 외의 시간만 활용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몸과 마음을 지독하게 몰아붙이니 번아웃이 왔다.


 나는 하나에 꽂히면 앉은자리에서 밤을 새우는 스타일이다. 열정과 집중력이 과해서 뭔가에 빠지면 성장도 빠른 편이다. 단기성장의 황홀한 기분을 알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실시간으로 단단해지는 느낌, 여기 멋지고 열정적이고 행복한 내가 오롯이 존재한다- 하는 어깨뽕 상승하는 느낌.


 레슨을 메인잡으로 하는 선데이 아티스트에게는 이 기분을 느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했다. 나 자신이 점점 초라하게 느껴졌다. 설상가상 요즘 학급의 반이상이 우울증이라는 고등학생들의 예의 없는 태도와 변덕스러운 기분에 치이다 보면, 애들 우는 소리나 받아주는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애들아...나도 우울증이야...) 하지만 난 훌륭한 어른, 번듯한 선생님이니까 괄호 속 진실따위는 당연히 속으로 삼킨다. 상담을 받거나 안정제를 먹는 사실은 절대 들켜서는 안돼...난 훌륭하고 인내심 많은 어른, 이해심 많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니까...


끝없이 발효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꾸덕하게 정체됐다.
이 직업은 더 이상 나를 성장시키지 못한다.
아니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했다.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나 자신을 찾겠다는 (대책 없는) 이유로 안정적 직장에서 빤쓰런했다는 흔한 모험담.


 그렇게 퇴사의 이유를 되짚어보니

 이제 집중해야 할 키워드는 두 개였다.



적성과 성장


해야 할 일의 조건은 세 가지로 좁혀졌다.

 

1.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일을 할 것

2. 적성에 맞는 일을 할 것

3. 당장의 소득에 연연하지 말 것

 

 

 마지막 항목은 중요하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자, 10년 넘는 시간을 그만두지 못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다. 내가 기꺼이 즐거히 밤을 새울 수 있어서 남편이 (나 죽을까 봐) 말려야 하는 그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에는 자동적으로 음악이 떠올랐다. 그래! 배수의 진을 치고 마음껏 앨범작업을 하는 거야 - 상상의 속도는 엄청나서 12곡 넣은 정규2집 발매하고 뮤비 찍고 한국대중음악상 타는 나를 상상하기까지 5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흥분한 속도만큼 빠르게 시무룩해졌다. 코로나 기간 내내 레슨과 작품활동을 병행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처음엔 레슨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매듭들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현재의 나는 인풋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 안에 뭔가 가득 차올라 있어야 곡을 쓸 수 있다. 난 지금 텅 비어 있는 기분인걸.



 자, 다시 다시, 정신 똑바로 차려.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래, 성장. 성장이 뭐지? 부족함을 채우는 것? 그럼 내게 부족한 게 뭐지? 안정적인 멘털, 지속적인 행복감...아, 그리고 통찰력! 이런 것들을 채우려면 뭘 해야 하는 거지? 명상을 하면 되나...?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는 생각은 갈팡질팡 복잡해지기만 했고, 이럴 때 헬프칠 곳은 단 하나. 통찰력의 아이콘인 나의 (INTJ) 남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오빠, 성장하려면 뭘 해야 해?"



  “잠깐만”



이때 남편이 한창 CHAT GPT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 빛의 속도로 반응한다 했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금마한테 질문을 토스하는 것이다!

ChatGPT의 조언


 처음엔 이 양반이 진지하게 묻는데 장난하나- 하고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빠르게 쏟아지는 챗지피티의 답변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나는 크게 뼈를 맞고 순살이 될 뻔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1.새로운 경험해보기

2.자기발전에 투자하기 (독서 운동 취미 교육)

3.자신에 대한 이해

4.새로운 관계 형성하기

5.실패와 문제에 대한 긍정적 마인드

6.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7.현재에 집중하기



 아...자연어처리 기술과 딥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 모델에게 혼나는 기분이란. 대답해 준 일곱 가지 항목이 죄다 어려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 거야... 좋아, 진입장벽이 낮은 일부터 차근차근해보자



다소 황당하게도 그렇게 나의 백수 라이프의 첫 플랜이 세워졌다. 챗지피티의 조언대로 '독서, 운동, 취미, 교육'에 시간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위해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브런치를 떠올렸고 지금 이렇게 쓰고 있다)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보니 조금 놀라웠다. 음악을 전공한 이후로 계속 음악이라는 도구를 통한 무언가를 시도했던 나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떠올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일과 작업에 치여 '읽고 쓰는 시간'을 사치로 느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인풋이 부족했던 나에게 독서는 오아시스 같았고 글을 써보니 내 안에 그저 텍스트로 뱉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잔뜩 쌓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년까지 작업하던 프로젝트가 가사가 너무 많아 산으로 가다가 중단되었던 이유를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음악이 아닌 글을 통한 아웃풋이 필요했던 걸까?



아무튼 고작 한 발을 떼어 놓고 속도 없이 설렌다.

자 어디 한번 세상 훌륭한 백수로 쑥쑥 성장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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