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도 Jun 06. 2024

악력의 쓸모

<어금니 깨물기>, 김소연, 마음산책

담아. 한동안 아침마다 불안감으로 잠에서 깼어. 백수가 된 지 한 달이 넘었고, 나는 일하지 않는 상태의 나를 잘 견딜 수가 없어. 졸업을 늦게 했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로 이리저리 방황한 시간이 길어서 이렇게 일하지 않는 상태의 내가 영 미덥지 않아.


불안으로부터 달아나 도착한 곳은 갑갑함만 있었어. 압박감으로 꽉 막힌 듯한 불편함. 도대체 나는 뭐가 문제인 거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다시 불안으로 되돌아 오고 말아. 나는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놓여. 불안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해. 얘는 어떻게든 내 곁에 있고 싶은가 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어금니 깨물기>의 문장이 떠올랐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그걸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늘상 주먹을 꽉 쥐며 생각해왔다. 지키려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겨우 얻게 된 것들과 꼭 얻고 싶었던 것들을 잘 지키는 것으로써 엄마처럼은 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이런 문장 앞에서 나는 좀 부끄러워져. 나는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쓴 적이 없는 것 같거든. 소중한 것들을 방치하곤 잃은 채 지금의 나에 이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미워지기도 하지. 가장 최근에 주먹을 꽉 쥐었던 건 퇴근길 지옥철에서였어. 한치의 움직임이 허용되지 않는 밀집된 지하철 안에서 스트레스와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일상이라니. 버티는 것 외에는 별 수가 없다는 데에 치가 떨렸지. 속으로 시발 시발 시발 욕만 되풀이했어. 온몸으로 유독 물질을 내뿜는 듯한 내 모습이 참담하더라. 내가 주먹을 꽉 쥐었던 건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이제는 악력을 버티는 데 말고 지키는 데에 쓰고 싶어. 


친구는 내가 꾸준히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는 “넌 참 돈 안 되는 일에 열심이구나.”하고 말했어. 글을 쓰는 일은 내게 전혀 돈이 되지 않으므로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만 하는 비효율적인 일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애정’은 무용한 짓들을 굳이 하게끔 만들기에 효율이란 잣대가 끼어들지 못하는 단어야. 효율, 생산, 성장, 발전, 개발…. 압력과 속력을 가하는 단어들에 애정의 영역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고 싶어.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를 힘차게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당분간 최대한 돈을 덜 쓰고 무용한 짓을 하며 어떤 이력도 되지 않을 시간을 보낼 거야. 지구의 한 귀퉁이를 잠시 차지하고 가는 작은 인간의 안과 밖에 대해 쓰면서. 나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바깥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접촉면을 갖는지 확인하며 세상에 더욱 촘촘히 연루되기 위해서. 


박스째 보관만 해오던 것들을 퀴퀴한 박스에서 꺼낸 날, 나는 곰솥 가득 물을 끓인 다음, 하나하나 끓는 물에 넣어 소독했다. 


며칠 동안 천천히 집을 정리했어. 옷장 속에 구겨진 옷들부터 찬장에 엉망으로 쌓여 있는 조미료, 각종 약들, 냉장고 속 곰팡이 핀 식재료, 버리지 못한 글들과 낙서들까지 매일 조금씩 들여다 보고 솎아 내고 있어. 씻고 닦고 매만지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동에도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껴. 아무리 망한 기분이 들어도 쓸고 닦고 단정히 할 나의 소중한 물건들이 있고 읽고 싶은 글과 쓰고 싶은 글이 있으니까 나는 다시 주먹을 쥘 수 있어. 나지막한 욕구와 담백한 애정들로 나를 지탱하며. 아마 한동안은 이렇게 느린 속도로 집을 정리하게 될 것 같아. 나는 어떤 것들을 버리지 못 하고 남겨 두게 될까?









작가의 이전글 예천 생텀 마을 방문기: 로컬보다 웰니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