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건실한 청년이 아니었음 해
도로를 촘촘히 채운 붉은 후미등을 보며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한강이 보였다. 검은 수면 위로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때맞춰 흘러 나온 노래가 하필 서울과 참 닮아서 비식 웃음이 났다. Gimmie, gimmie. Gimmie, gimmie, don’t stop. I need you right now. 내게 줘, 멈추지 마, 당장 원해!
건너편 마천루 아래에도 차들이 빼곡했다. 다들 이 밤에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에 모여 무얼 하며 밤을 보낼까? 나도 그곳에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란함과 화려함 쪽으로 등 떠밀리는 서울이 견디기 어려워 고요한 완주로 갔는데 오랜만에 만난 서울은 가슴 뛰게 반짝거렸다. 어라? 분명 이 흘러 넘침에 휘말리는 분위기가 진절머리 났었는데 왜 지금은 다시 원하게 된 거지? 음악의 볼륨을 더 크게 높이고 몸을 흔들었다. 문득 선명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크롭탑 입고 싶다! 배 까고 싶다! 클럽 가고 싶다!” 반짝이는 유혹들이 피부에 들러 붙어왔다. 해변의 모래처럼 좀체 털어지지 않았다. 차 안, 혼자만의 춤사위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질릴 만큼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로, 허용치 초과의 소음으로, 끝없이 명멸하는 조명 아래로 들어가고 싶다.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뭘 그렇게 꾹꾹 누르며 지내 왔길래 이런 욕구가 생긴 거야?
완주에서 내가 주로 입는 옷은 건실하고 싹싹한 청년의 옷.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지역 사회 커뮤니티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뭣도 모르고 까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물 흐리는 외지인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눈치 보면서 스며 들기를 택했다. 거슬리지 않고 튀지 않는 순한 청년 되기, 싹싹하고 열의 있는 프리랜서 되기. 그건 잘 해내고 싶은 역할이었고 기꺼이 입고 싶은 옷이었다. 인구가 적은 완주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쉬이 눈에 띄고 각인된다. 그건 자영업자로 살아남아야 하는 내겐 환영할 만한 이점이었다. 다만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는 건실한 청년이라는 옷은 24시간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그 옷을 잠시 벗고, 불안과 외로움, 욕구로 드글거리는 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평소에 입지 못했던 옷을 입고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다. 아무 시선도 받지 않고, 특정되지 않은 채로. 그러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금세 묻히는 소음이 필요했다. 서울에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서울 일정 중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엔 일부러 버스를 탔다. 버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고 내내 풍경을 쳐다 봤다. 밤 9시 반에도 환히 불이 켜지고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버스는 익숙한 듯 어색했다. 완주에서 9시 반은 한밤인데 서울의 하루는 끝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밤새도록 떠들고 취할 수 있는 즐거움이 곳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완주에 가는 것은 그 즐거움의 수많은 가능성을 놓치는 기분을 들게 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환승할 버스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쌉싸름한 그리움이 올라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가능하다면 한참 동안 그곳에 아무도 아닌 채로 앉아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예상보다 더 도시에 물들어 있던 사람이었구나. 이게 이토록 고소한 고독감이진 않았는데… 그러자 금세 공허함으로 터질 것 같았던 밤들이 기억났다. 거리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그 공허함을 채우고자 취하고 웃어대던 내가. 내리 익명인 채 흘러 넘침 속에 있는 것은 힘들었지. 그걸 고새 잊고 익명의 허허로움을 달게 느끼다니 완주 사람 다 됐다 싶었다.
완주로 돌아오는 길에는 또다시 그 노래를 틀었다. Gimmie, gimmie. Gimmie, gimmie, don’t stop. I need you right now. 잠시간 서울에서 누린 익명의 시간 덕에 조금 더 가뿐한 마음으로 몸을 들썩거리며 혼자 외쳤다. 고작 크롭탑이 뭐라고! 너무 쫄아 있었어! 당분간은 은근슬쩍 다른 옷을 꿰어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건실한 청년의 옷 외에도 입고 싶은 옷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