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5
2024년 여름 내내 후지산에 가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연초 한라산 정상 찍고 기고만장해져서 어디 더 높은 산 없나?하고 찾아보던 중 눈에 띈게 3,766m의 후지산이었는데 기왕 가는거 후지산만 오르긴 아까워서 5박 6일간의 생애 첫 일본여행을 계획했다.
출발 전날까지 회사에서 나를 매우 힘들게 하는 작업이 있어서 새벽까지 계속 붙들고 있었다. 팀원 송별회식도 있어서 4시 반쯤 일어나야 되는데 1시 다 되어서야 잘 수 있었다. 결국 문제 해결도 못 하고 여행 준비도 못해서 동선도 개망해버렸고요.
해외 여행을 하려면 쨋든 인천공항에 가야 한다. 아침 비행기라 이른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갔는데 정신없이 자다가 옆사람 내릴 때 깨서 허겁지겁 내렸다. 내리면서 여기 인천 맞냐고 물어보니까 기사님이 미련하게 쳐다보더니 ‘1터미널’ 맞다고 대답해주셨다. 예전에 가다말고 김포에서 내린 트라우마가 있어서 내릴 때 항상 확인을 하고 내린다.
이 떄가 6시 반쯤인데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공항이 아주 한산했다. 이럴 때 기분이 참 좋다.
날아간다~ 동해안으로는 처음 날아가 봐서 몰랐는데 우리나라 산 정말 많더라. 산자락이 유난히 예뻐서 GPS 찍어보니까 태백 부근이라고.
2~3시간의 짧은 비행 끝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근데 아무 준비 없이 와서 뭘 해야되는지 아예 몰랐다. 뭔지도 모르는 VWS를 해야된다길래 벙쪄서 앞사람 하는 거 보고 무작정 따라서 했다. 다행히 입국심사부터 거절당하는 불상하는 면하게 되었다.
진짜 순수하게 몸과 정신만 챙겨왔기 때문에 현금이 한 푼도 없었다. 하나은행 계좌 있으면 세븐뱅크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는 거 하나만 주워듣고 왔는데 세븐뱅크 ATM이 다른 터미널에 있단다. 이거 너무 먼데 돈도 없고 걸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눈앞에 무료 셔틀이 구원처럼 나타나서 바로 타고 가기로 했다.
역은 금방 도착했다. 10분 걸렸나. 세븐뱅크 ATM 있다길래 얏따!하고 달려갔는데 개찰구 안쪽이라 표를 사서 들어가야 했다. 키오스크(라기 보단 아날로그 자판기)에서 표 끊는데 카드 결제가 안 돼서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으나 멘탈 잡고 카운터로 가서 결제했더니 카드를 쓸 수 있었다.
드디어 돈 뽑나요~
는 펜스 너머였다. 그말인 즉슨 기차 타고 내릴 때까지 난 현금없는 한 푼 사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본은 현금 없이는 불구와 다름 없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온 터라 여행의 설레임은 사라지고 빈자리가 두려움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신차리고 우선 움직이기로 한다. 애플맵이 텐가차야 역까지 가서 오사카레일로 갈아타라고 말해줘서 일단 그렇게 표를 끊었다. 일본 표는 아직도 종이티켓을 사용한다. 종이티켓은 본지 10년도 넘은 듯.
기차 타고 찍은 사진은 없다. 짐도 많고 옆자리 중국사람이 자꾸 중국어로 말을 거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환승해야 되는데 환승은 또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싶어서 그냥 텐가차야에서 내려버렸다.
사진은 역 앞에 100엔샵? 같은데 예뻐서 찍어뒀다. 일본은 볼드한 폰트를 참 예쁘게 잘 써먹는 것 같다.
냅다 걷기 전에 나는 여전히 현금없는 사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기에 난 반드시 세븐뱅크 ATM을 찾아야 했다. 역 안에서 겨우 찾은 ATM은 정확하게 세븐뱅크만 지원을 안 했다. 세븐뱅크는 대체 왜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고 일단 걷는다. 오사카의 여름은 뜨거웠다. 아무렇게 걷다 보니 왠지 중랑동부시장이 떠오르는 골목이 나왔는데 낮이라 그런지 연 가게가 별로 없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자전거에 양산을 달아서 가고 계신다. 씽크빅이 따로 없다며 냅다 사진부터 찍었는데 일본 자전거 10대 중에 7대는 양산을 달고 다닌다. 우리나라에 한시 바삐 보급되어야 하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이런 아기자기한 간이역도 마주쳤다. 도보 여행은 이런 우연한 발견이 묘미인듯.
정처없이 걷다가 익숙한 간판을 마주친다. 다만 7 아래에 ATM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 혹시 쟤가 7뱅크 ATM인가? 싶어 들어가 봤더니 정답이었다. 일본 7/11은 은행도 같이 하나 봄.
일본 덥다고 겁을 하도 줘대서 많이 쫄았는데 생각보단 걸을만 했다. 어째 한국이 더 더웠던 것 같다.
그렇게 한시간 쯤 걸었을까 슬슬 배가 고파졌다. 이 때가 오후 1시쯤이었는데 하루종일 먹은게 시리얼 한컵이랑 샌드위치 하나밖에 없었으니 배고픈게 당연했다. 일본에 왔으니까 라멘을 먹어줘야지 싶어서 구글맵을 한참 뒤져보다가 덥기도 하고 슬슬 정신이 혼미해져서 걍 사람 제일 많은 가게로 들어갔다.
라멘 맛은 나쁘지 않았다. 별을 주자면 3.5/5 정도. 사실 것보단 저 뒤에 살짝보이는 GABAN 후추가 조미료 GOAT다. 시판 후추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간 통후추같은 풍미가 남아있는데 너무 맛있어서 라면이 먹물파스타로 보일 때까지 뿌려먹었다.
메이드 언니들이 전단지 뿌리던 애니메?거리도 지나가보고요.
머리 비우고 1시간 좀 넘게 걷다보니 어느새 숙소 도착. 여긴 신사이바이에 위치한 고급형 캡슐호텔인데 숙박은 도미토리지만 인프라는 호텔식인 잡탕식 구조다. 특이한 점이라면 꼭대기에 퍼블릭 스파가 있다. 캐리어도 없이 배낭만 2개를 메고 다녀서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는데 가서 잘 풀어줬다.
씻고 나오니까 오후 4시 언저리. 숙소애선 딱히 할게 없어 밖으로 나왔다. 행선지는 길 잃고 돌아다니다 봐 뒀던 생선구이집이었다. 밥 먹긴 좀 이른 시간이 아닌가 싶지만 오사카는 뭐 이렇게 할 게 없는지;; 특히나 솔로 여행객인 내게는 가족 혹은 연인 위주로 구성된 오사카의 놀거리를 즐기기가 힘들었다.
주문한 연어 뱃살정식이 나왔다. 숯불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는데 한국에서 먹던 느낌이 아니라 꽤 맛있게 먹었다. 근데 저 무 간거는 대체 어케 먹는 것인가. 소바에 넣어만 봤지 반찬으로 나오는 건 첨이라 생선에 소심하게 얹어 먹었다.
당시 위치가 신사이바시인데 일행도 없고 쇼핑도 안 좋아하다보니 심각한 컨텐츠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일단 도토루라고 먼가 메가커피같은 카페에 들어가서 정비의 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이 때 앉아서 사진 정리하고 후지산 가는 방법 알아보다가 고산병 대비용 산소캔을 안 샀다는게 기억났다.
구글링 해보니 토요핸즈?라는 곳에 산소캔 있다길래 쇼핑몰로 ㄱㄱㄱ
어찌저찌 중심가에 도착했는데... 아뿔사! 일본어를 모르니까 뭐가 토요핸즈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내 옆에 있다는데 보이지는 않고 지도는 자꾸 초라한 행색의 여행자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곳으로 안내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어갔다.
이 안에 있다길래 돌아다니는데 토요핸즈는 안 나오고 험한 것이 튀어나온다. 오사카에서 엑스포 한다고 홍보 + 마스코트 굿즈 판매 중이었다. 저런거 누가 사나? 싶은데 사실 내가 하나 삼..ㅎㅎ
불굴의 의지로 백화점을 쑤시고 다닌 결과 9층에서 토요핸즈를 만날 수 있었으나 영업시간이 지났다는 안내문이;; 다행히 계산대는 안 닫아서 후다닥 달려가서 산소캔만 계산했다.
백화점 1층에 인센스 팝업스토어가 열려있었는데 향덕으로써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선물용으로 괜찮아 보여서 하나 사볼까 했는데 가격이 1,950엔 ㄷㄷ; 인센스 향수보다 비싸다!
향 자체는 보급형 인센스에서 쉽게 맡을 수 있는 퀘퀘한 냄새도 심하지 않고 상당히 고급스러운 향료를 썼다는 느낌을 준다. 돈 많은 분들은 나중에 저기 가서 하나씩 건져오시길. PARCO 1층에 KUNGYOKUDO(쿤교쿠도)라는 곳이다.
나온 김에 탄력받아서 오사카의 명물 ‘그 녀석’을 보러 가기로 한다. 원래 랜드마크 진짜 안 찾아 다니는데 지금 아니면 다신 안 올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가보기로 했다. ‘그 녀석’과 가까워지고 있음은 과밀해지는 인구밀도를 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드디어 만난 ‘그 녀석’과 다같이 반자이를 하며 축하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함께 박수 치며 기뻐해주는 든든한 백아저씨.
오래 있긴 싫어서 빠르게 대피한 후 오는 길에 봐놨던 초밥집 가서 기본초밥을 하나 포장했다. 한국어도 써 놓은게 먼가 투어리스트 트랩같아서 가기 싫었는데 기본초밥기준 가격도 875엔으로 저렴하고 맛도 가격 생각하면 나쁘진 않았다. (맛있단 소리는 아니고요.)
아 그리고 일본은 희한한게 카드로 계산한다고 하면 리더기를 직접 긁게 시킨다. 니 돈은 니 손으로 직접 이런 느낌인데 좋은... 문화인가?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서 첨 보는 맥주 하나를 집어왔는데 검색해보니 아키아지라는 맥주라고 함. 기린에서 가을 시즌 한정으로 만든 맥주라고 일부러 농도랑 도수를 높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하고 맛있었다. 수입하면 사먹을 의향 500%
이렇게 첫째날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