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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y 21. 2020

산타할아버지는 있다! 없다!

혹은 애매모호함에 대하여

“너 참 순수하지 못해.”     

며칠 전 친구와 대화 중 누군가의 칭찬에 토를 달아 재해석하는 내게 친구는 이렇게 질책했다.  나는 무언가를 단언하고 정의하는 것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친구 말대로 순수하지 못해서 그런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숨은 의미를 찾아 요리조리 돌려보고 뒤집어 의심한다.  스스로 회색분자가 아닐까 의심하게도 된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하며 우물쭈물하는 것도 내 특기다. 우유부단함의 대가라고나 할까? 똑 부러진 나만의 생각을 갖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성향에 남몰래 열등감을 느꼈던 적도 많다. 좀처럼 고쳐지지 않다 못해 이젠 슬그머니 '회색의 변'을 내세우고 싶어 진다. ( 더욱 구제 불능한 '비순수'의 늪으로 빠져드는 걸까? )     



오래전 당시 초딩 아들에게 한 번은 심한 고초(?)를 겪었다. 엄마들은 공감할 일이다. "이제는 엄마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 대략 이런 취지로 철도 아닌 어느 따뜻한 날, 평소 개구쟁이 아이답지 않게 꽤 진지하게 나를 구슬렸다. 엄마인 나로서는 아이 마음에 동화되어 살다 보니, 어느새 아이가 세상 이치 좀 알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눈치 없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들먹이길 멈추지 않았었다. 아이는 능청스러운 엄마에게서 허심탄회하게 '산타클로스 부재'에 대한 자백을 받고자 별렀던 것이다.     


산타할아버지의 유래는 알고 보면 꽤나 인간적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딱히 그 양반 부재의 증거를 알 수 없었기에 (사실 지금도 그렇다.) 아들의 모진 심문에도 끝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곡하게 진심을 담아 할아버지 부재를 알 수 없다는 결백한 마음을 전했지만, 아이는 끝내 썩은 미소를 날리며 엄마인 나를 ' 못 믿을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리는 듯했다.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면, 극단의 가치가 충돌하는 극단의 사회에 오래도록 휘둘려 왔다. 어릴 때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 환경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개성이란 단어도 모르고 살았다. 전체주의적 가치 안에서 주입식 교육으로 통제받는 것에 익숙했다. 청년 시절에는 민주주의 물결을 두려워하는 반독재 하에서 피비린내 나는 혼란을 겪었다. 폭력과 모함, 반목이 극단의 가치 사이에서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 우, 남 - 북, 호남  영남, 남  여, 신세대 대 구세대, 진보 대 보수,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 격동의 세월을 겪으며 오늘 우리 앞에 남겨진 반목과 대결, 구분과 경계의 가치들이다. 지난날 어리석고 무심하게 이끄는 대로 조종당했던 나를 떠올리며, 더 이상은 세뇌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세계키기 위해 나름 바쁘게 머리 굴리며 산다.


가상세계의 탄생과 함께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 이르기 전까지 유일한 정보통 역할은 물론 언론이었다. 기득권 통제 아래서 언론은 자유롭지 못했고, 그럼에도 당시 일부 올곧았던 언론은 피 흘려가며 사명을 다하고자 고군분투했다. 그런 역사는 우리가 오늘 달콤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폭력은 확연히 사라졌지만,  또 다른 국면이 우리를 맞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 가짜 뉴스가 전 세계적으로 판치는 세상이다. 진실은 변형되고 날조되어 우리 사고를 헤치고,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언론 중 일부는 주어진 자유를 무기 삼아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를 향해 마구 휘두른다. 또 다른 폭력의 난무를 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정보가 우리의 감각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얕고 가벼워진 내 감각을 이용하려는 검은 정보가 도처에 널렸다. 그럴듯한 헤드라인 문구의 표면만을 훑고 뉘앙스에 설득되어 혀를 차던 기억은 드물지 않다. 나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하거나 당할 틈새가 너무 많다. 그 덫을 나는 경계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대표 매국노 '이완용'에 관해 심층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진실을 제대로 확인하고, 바르게 분노하기 위한 이유로.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가 반역자임을 전해 듣고 낙인찍기에 동조했을 뿐, 스스로 진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다. 낙인에서 멈춘다면 진실은 감춰지고 단죄는 희석될 수 있다. 이 또한 왜곡이다.     

 


화끈한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 먹는 것도 화끈하게 맵고 짜고 단것을 선호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지 애매모호한 건 자칫 기회주의자나 우유부단함으로 치부된다. 흔히 회색분자라고도 한다.     


이쯤에서 나는 회색의 항변을 늘어놓고 싶다. 얼른 정의하고 구분 짓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우리를 갈라놓기에 좋은 '사고의 기호'가 아닐까 의심해 본다. 나는 양분의 경계선을 경계한다. 더 섬세하게 분명해지기 위해 선명한 경계선을 지우고, 흐린 회색빛을 드리운다.      


매운 거 단거 짠 거 먹다 보면 자극을 중화시킬 물은 꼭 필요하다. 매운 것과 물처럼, 극단의 것은 대립이 아닌 서로의 보완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게, 위에 열거한 우리 안의 대립 과제들을 다시 조합하면 갈등보다는 통합의 이유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 남과 여, 호남과 영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립 대신 화합과 보완의 조화로 서로 좋은 의미를 찾아 취하는 건 어떨까?     


애매모호함이나 회색빛은 다차원적이고, 보다 섬세한 접근의 융합적인 가치라고 해석하면 회색의 변이 될 수 있을까? 판단의 보류, 여러 측면으로 들춰보는 것, 관계된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살피는 것, 의도를 따져보는 것.  


진실을 알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저 회색지대를 더 꼼꼼히 밟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직접적인 이득을 챙기려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기회주의는 여기서 배제해야 한다.     



아이는 이제 내게 '산타할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더이상 취조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준비가 되었건만. 때로는 쓸데없는 회색빛 고집으로 신뢰를 잃을 위험도 있다.


늦기 전에 친구에게도 말하고 싶다. "이제 순수해지려 애써 볼게. 다시 내게 칭찬해 주렴"


회색빛을 띤 나도 분명한 것이 있긴 있다. 누가 뭐래도 짬뽕보단 짜장이다. 개보다는 고양이다. 단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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