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전과 이후. 두 삶은 극명하게 다르다. 엄마가 된다는 건 또 다른 탄생의 경험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결혼을 예감했을 때 가장 두려운 건 ‘엄마 됨’이었다. 아이를 건사하고 훈육하고 보듬는 주변 모든 엄마의 일상은 내게 기적처럼 대단해 보였다. 치열한 전장의 용맹 무사와도 같은 힘겹고 도달 불가한 지점에 엄마들은 늘 서 있었다.
주춤주춤 이끌리듯 나도 엄마가 되어 아기와 나란히 누운 첫날. 산후 부실한 몸으로 엉거주춤 거실을 걷다가 현관문 옆 종이상자 안에서 파르르 떨고 있던 노랑 병아리를 보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조카가 학교 앞 노점에서 용돈을 털어 담아온 병아리였다. 나는 상자 속에서 서로의 깃에 파고드는 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 연약함이 갓 태어난 내 아기와 닮아 보여서 가슴이 아파와 눈물이 흘렀다.
그 며칠 후에는 집안을 걷다가 가시 돋친 압정을 밟았었다. 통증에 깜짝 놀라며 이내 가슴이 털썩 내려앉았다. 만에 하나 파상풍에 걸려 내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그 길로 곧장 병원에 달려가 예방주사를 맞는 수선을 피웠다.
아기의 수호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때때로 나를 잔뜩 겁먹고 움츠러들게 했다. 엄마의 시작은 이렇게 과한 연민과 두려움을 담은 과잉된 모성애로 시작되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나는 직장생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시작한 전원생활로 아이의 하교를 학원버스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툭하면 한눈을 팔다 버스를 놓치고 낯선 학교 주변을 홀로 방황하곤 했다. 그렇게 늦은 저녁 퇴근길에 아이를 찾아 헤매는 일이 빈번해졌다.
알아듣게 타일렀다고 생각했던 그날도 역시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피곤한 귀갓길에 걱정과 화가 엇갈리며 평정심을 잃은 나는 아이를 찾아 낚아채듯 데려와서는 회초리로 엉덩이며 다리를 세게 내려쳤다. 엄마라는 직분의 피로와 무력감으로 철부지 아이의 여린 몸에 맘껏 분풀이를 하고 말았다. 서럽게 울다 잠든 아이 곁에서 시퍼렇게 멍든 다리를 들춰 보며 깊은 자괴감에 몸서리치던 밤이었다. 이후 영원히 매를 내려놓는 계기가 그렇게 생겼다.
때로는 아이와 의기투합으로 끈끈한 모자간 의리를 다질 때도 있었다. 고집은 세지만 조용한 성격인 큰아이가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의외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 00 이가 벌점 30점을 넘겨서 선도위원회에 회부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뭔가 엄청난 죄로 감당 못할 벌에 처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론가 숨고픈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추스르고,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아이가 공을 차면서 몇 차례 화단을 밟은 규칙 위반과 귀밑머리를 자르지 않은 채 매일 누적된 벌점이 한도를 초과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담당교사는 아이와 엄마인 내게 사전 통보로 주의를 줘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다.
사춘기 제 멋대로인 아이도, 처음 들어보는 ‘선도위원회’라는 무시무시한 처사에 잔뜩 위축되었다. 아이의 과한 수치심과 죄책감은 오히려 자기 잘못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훈계 대신, 일이 커지도록 방치한 어른들의 무심함이 더 나쁘다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선도위원회가 열린 날, 아이와 나는 죄인인 양 나란히 불려 나갔다. 나는 먼저 아이의 교육에 부실한 엄마였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동시에 어른들의 무심함으로 ‘처벌의 자리’까지 이르게 한 상황의 비교육적 측면을 정중히 항의했다. “주의와 훈육만으로도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고칠 수 있는 아이입니다.” 라며 아이에 대한 신뢰를 치켜세웠다. 선도위원들은 내 발언에 고개를 연신 끄덕여 주었다. 그때 고집스러운 사춘기 거뭇한 턱수염의 아이는 순한 눈빛으로 엄마인 나를 바라봤다.
위기 앞에서 모자간 진한 전우애의 추억을 가슴에 담는 순간이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마를 그런 자리에 세우니까 속이 시원하더냐"며 감성 어린 잔소리를 실컷 퍼붓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이미 진작부터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수학 문제집을 풀며 아이가 헤매는 문제를 나도 함께 헤맬 때, 영어문장을 해석하지 못하겠다고 실토할 때,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깨는’ 눈빛을 나는 보았다.
아이의 성장 앞에서 부모의 전능함이란 허울이 벗겨져 내리고, 한 인간으로서 약하고 부실한 속내를 드러내 보여야 하는 때가 온다. 더구나, 평생 자신의 든든한 울타리라고 믿어왔던 부모의 이혼은 그들에게 큰 상처였을 것이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많이 부족하고 허점투성이 인간임을 고백했다.
그들은 불안하고 슬프고 화가 났을 것이다. 배신감도 느꼈을 것이다. 잠깐 동안 그들의 격한 흔들림을 느끼며 나는 마음을 단단히 했다.
이제 엄마로서 나는 다시 알을 깨야 했다. 어느덧 장성한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모성애의 허물을 벗어야 했다. 그 또한 또 다른 모성애의 발로다. 아이 어깨에 지워진 짐을 함부로 대신 내리려 들지 않아야 한다. 상처를 안긴 엄마로서 미안함을 견뎌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인간은 자기 상처를 안으며 성장한다. 상처에의 고뇌는 삶을 더 성숙시키고 깊이를 더해 주기도 한다. 후퇴든 진보든 불행이든 행복이든 그들의 선택이고 몫이다.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메고, 자기만의 길로 접어들었다.
내 삶의 에너지는 모성애라는 먼 길을 돌아 다시 스스로의 삶을 향해 있다. 엄마라는 짐을 내리고 나 자신으로 돌아와 다시 청춘을 사는 것은 모성애의 완성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부모 자식 관계지만, 동등한 인간으로 서로의 삶을 바라봐 준다. 그 시선이 있어 매일 넘어지지만 매일 일어날 힘을 얻는다.
엄마로 살아온 삶은 나의 부족함과 허물을 확인하는 온통 부끄러움과 불찰의 시간이었다. 다만, 함께 넘어지고 깨지며 자식이란 존재로 여기까지 함께 와준 그들의 어깨가 어느새 넓어져 있음을 느끼며, 내 부끄러운 마음을 달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