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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Jul 19. 2020

장대비 온 날, 함박눈 추억하기

겨울 한라산에서

2020년 2월 2일 한라산 백록담 탐방기


며칠 전 세상이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계획에 떠밀려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번잡한 우리네 삶과는 달리 푸른 바다와 흰 파도, 짠 내 나는 바람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고 평화로웠다.

연중 내내 관광객으로 붐비는 제주도는 시절이 그러해서인지 어디를 가도 한가롭고 호젓했다. 이번 여행은 한라산의 눈 풍경 속 백록담 방문이 주목적이었다.

 섬의 날씨는 바람과 구름의 실랑이가 내륙과는 사뭇 달라서인지, 곳곳마다 변화무쌍한 하늘이 펼쳐졌다. 시내는 포근하고 청정해서 눈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해발 1100미터에서 시작되는 산행 초입부터 1950미터 정상의 백록담에 이르는 한라산은 낮게는 종아리만큼, 깊게는 1미터가 넘는 깊이로 눈 세상이 펼쳐졌다.

산행 당일에는 섬 이곳저곳에 한적하게 흩어져 있던 관광객이 설산 등반을 위해 모두 모인 듯, 산 입구는 이른 아침부터 들뜬 사람들로 붐볐다.  


정상을 향한 등반객에게는 중간기점에서 오름과 내림의 때에 지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자칫 길을 잃거나 설산의 매혹에 위험을 당할 수 있다. 때문에 사람에게 허용된 길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얀 설산 속 한줄기 가느다란 사람의 행렬로 가다듬어져야 무사히 겨울 산의 품으로 향할 수 있었다.

 눈밭을 걷고 또 걷다 보면, 흙과 먼지에 누렇게 질척거리던 길은 어느새 그 때를 모두 벗고 숱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지나가도 티끌 하나 없는 순백색의 눈길로 이어졌다. 그 하얀 길을 따라 걸으며, 마음도 점점 정갈해지는 것 같았다.

 눈꽃이 한껏 두텁고 곱게 내려앉은 우아한 나무숲의 풍경은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설경에 거친 숨을 고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뭇가지 위 소복한 눈은 나풀거리는 눈꽃가루처럼 보이지만, 장갑 낀 손으로 만져보면 단단하고 묵직한 얼음이었다. 겨울나무는 여린 가지 위로 켜켜이 내리는 눈을 보듬어 겨우내 함께 얼어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은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동시에 서로의 무게를 함께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 화려한 외양 내면의 시리고 묵직한 얼음을 견디고 있는 우직한 나무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름다움에 이르는 세상 모든 것의 내면은 이렇게 시리고 무거운 것을 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젠가 사진으로 본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거친 발가락의 모습처럼. 눈 쌓인 겨울나무에게서 아름다움의 본모습을 배운다. 자기 몫의 무게를 견디는 모든 것은 끝내 아름다울 것이다.


 길고 긴 강행군 속에 쇳덩이처럼 무거워진 다리를 이끌고, 좀처럼 닿을 것 같지 않았던 백록담 앞에 드디어 설 수 있었다. 평생 처음 밟아보는 백록담 정상에 이른 벅찬 감격도 잠시, 산 정상에서의 낯선 구름과 바람의 격한 흐름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정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빨리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하산길에서는 웅장한 설산 앞에 숙연해진 듯, 길고 고된 산행에 지친 듯 고요한 침묵 속 각자의 생각에 잠긴 사람들의 행렬에 뽀득뽀득 눈 발자국 소리만 분주했다.

 “다 이루었다!”

함께 온 독실한 기독교 신자 동료에게 물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마지막 말임을 알았다.

산행이 끝난 후 심신이 불살라져 재가 되어버린 듯한 상태로 나도 외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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