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매력은 울창함에만 있지 않다. 호젓한 겨울 숲길은 한창때 못지않은 내밀한 향기로 내 발길을 유혹한다. 요즘은 틈만 나면 집 앞 숲길을 걷는다. 젊음을 막 통과한 나와 겨울 숲은 딱 어울리는 한 쌍이지 싶다.
뜨겁게 타올랐던 계절 생의 잔재는 낙엽으로 쌓여 발아래서 바스락거리며 지난날을 속삭인다.무성한 잎사귀를 벗어버린 가지는 생의 지향점을 말하듯 높게 뻗어 하늘을 가리킨다. 겨울 숲에 날이 저물면 나무 끝 가지 위에서는 새들이 분주하다.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듯 긴밀하게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바쁘게 지저귄다. 발아래 숲길을 걷는 나는 그네들 꿍꿍이 세상사가 궁금한 한낱 객일 뿐이다. 한해의 여운 가득한 겨울 숲에선 그렇게 또 다른 생명이 활개 치며 움튼다.
얼마 전 나는 병원 응급실에 다녀왔다. 잊을 만하면 도지는 증상 탓이다. 이유 없이 심장 박동이 빨라지거나 불규칙하게 두근거리는 증상이 일 년에 두세 번쯤 생긴다. 특히 날이 추워지는 이맘때 잘 그런다. 잠깐 그러다 말던 것이 이번엔 좀 더 심하게 오래가는 듯해서 병원 신세를 졌다. 검사 결과는 늘 ‘이상 무’ 다. 해가 바뀌는 시기에 발맞춰 내 심장도 발 바꾸기를 하듯 갑작스레 불협화음을 낸다. 문득 삶(혹은 죽음)이 은밀한 신호를 담아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다. 그 불길한 암호 음을 떨치려 집을 나서 길을 걷는다. 겨울 숲의 화려한 잔재를 거닐며 내 삶의 잔재는 어떨까 상상한다. 심장 리듬에 숨겨진 난수표를 받아 들고 해독을 시도하듯.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에 낯선 노인이 방문하셨다. 자손들이 출가하고 텅 빈 집에서 홀로 지내신 할머니의 오랜 이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자네들 할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었어. 세상에 둘도 없는 양반이었지.” 할머니에 대해 이렇게 추억하셨다. 말씀을 듣자 하니, 그분의 ‘양반’이라 함은 사람을 귀히 여기고 예의를 아는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의미했다. 생전 ‘양반’이었던 할머니 마지막 길에 꼭 인사하고 싶었노라며, 그분이 경험한 할머니와의 일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그 후 나는 자손인 내게도 그런 ‘양반’이 잠재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싶어 졌다. 동시에 몸과 마음이 늘 정갈하고 단정했던 아버지와 친절하고 따뜻했던 엄마에 대한 추억에도 슬며시 나를 겹쳐본다. 사진 속 온화한 미소를 내 표정이 따라서 지어 본다. 내 삶은 그들의 삶에 이어지고 얹혀 흘러왔다. 더불어 나를 기억하는 이에게 내 삶은 또 어떤 모습으로 흘러들어 갈는지.
그런가 하면, TV에서 마주한 ‘무소유’ 법정 스님의 장례 영상은 꽤 충격적이었다. 스님의 주검은 절간을 순례하는 승자 행렬의 어깨 위에 가랑잎처럼 누워 있었다. 관도 없이 한 겹 천에 덮인 채 드러난 몸의 윤곽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잔잔했다. 한 줄기 바람에 훌쩍 날아오를 듯 한없이 가벼운 투명에 가까운 주검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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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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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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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법정 스님 말씀 중 일부 >
법정 스님은 물질적 무소유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자신의 말과 글까지도 사후에는 남겨지지 않기를 유언하셨다고 한다.
부모가 남긴 정신을 소유하려는 욕구와 어느 날 남겨진 이들에게 기억되고픈 내 잔재에 대한 집착은 마음을 번잡하게 한다. 또한, 자신에 대한 착시를 불러 진정한 내 모습과 만남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텅 빈 마음은커녕 삶과 죽음 사이 복잡한 수지타산에 꽉 찬 내 마음은 무겁고 비좁다. 물질적 탐욕처럼 마음의 탐욕도 삶을 뒤틀리게 하는 건 마찬가지다.
겨울 숲 헐벗은 나무는 다시 찾아올 푸르름을 꿈꾸며 발아래 낙엽과 함께 잠들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메마른 가지는 나무의 텅 빈 본마음이 아닐까. 겨울나무와 스님의 가랑잎 같던 주검과 남겨진 가르침이 겹쳐진다.
움켜쥐려던 마음의 허영을 내려놓을 것
순간 속에 최대한 최선으로 있을 것
텅 빈 마음의 울림에 귀 기울일 것
그러니, 불길한 신호음 따위는 잊을 것
겨울 숲을 거닐며 법정스님의 말씀을 되뇌다, 발 바꾸기 하는 내 심장음이 던진 난수표의 비밀을 나름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