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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Dec 25. 2020

오늘도 따뜻한가요?

사랑의 온도


12월의 창가.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다가가 등을 붙여 앉는다. 잔뜩 움츠렸던 몸이 햇살의 온기를 한껏 품는다. 수억의 세포들이 기쁨의 함성이라도 지르는 듯 간질간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따스함이 사무치는 날들이다.

      

바야흐로 갱년기를 맞았다. 평소의 몸 상태는 느리게 규칙적인 시계 초침의 흐름처럼 세월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몸의 변화에서 훌쩍 건너뛰는 세월을 느낀다. 그중 두드러지는 것은 체온 조절의 불협화음이다. 몸 안에서 도깨비불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접힌 속살에는 땀이 흥건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몸의 중심은 화끈한데 손발은 차갑다. 수시로 덥다가 갑자기 추워진다. 겨울 옷차림으로 필수 아이템이던 색깔 고운 목폴라는 이제 처분해야 할 것 같다. 어쩌다 꺼내 입고 외출했다가 후끈한 열기를 감당 못 하는 몸에서 천불이 나 고생한 뒤론 쳐다도 보지 않는다. 이제 언제든 입고 벗기 편하게 펑퍼짐한 옷만을 골라 입는다. 화병 발병 시기가 이즈음인 것이 십분 이해된다. 켜켜이 쌓인 마음의 체증이 갱년기를 맞아 신체적 부조화를 불쏘시개로 화가 폭발하는 기전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온기에 부쩍 민감해졌다. 그래서 따스함도 종류에 따라 취사선택한다. 겨울 아침 베란다 창에 드리워진 햇살은 그런 면에서 최고품질의 온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반면 오랜 아파트 생활로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구들 방 아랫목의 깊고 뭉근한 따스함이다. 그 은근한 맛을 알기에 편리하게 널리 쓰이는 전기 보온매트와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다. 침대에서 한기를 느껴 자다가 깰지언정, 전자기기에서 흘러드는 표면적 따스함에 몸을 맡기고픈 마음이 영 생기지 않는다. 괜한 옹고집에 사서 고생이다. 대신에 빨간 벨벳 덮개가 씌워진 물주머니를 하나 장만했다. 물을 데워 담은 주머니를 끌어안으면 한나절 내내 포근하다. 그 온기가 좋아서 얼마 전 이사한 지인에게 집들이 선물로도 건넸다. 진솔한 온기로 내 마음도 함께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내게 따스함의 최고봉은 지금 입고 있는 검정 조끼다. 몇 년 전, 언니가 한창 바느질에 재미를 붙였을 때 만들어 준 옷이다. 짤막한 길이에 단추도 주머니도 없는 단순한 디자인이다. 풍성한 털이 심어진 도톰한 겉감에는 내 취향인 스팽글이 드문드문 박혀 이따금 반짝거린다. 갱년기의 겨울, 조끼는 부실하고 변덕스러운 몸에 딱 맞게 은근한 온기를 품는다. 서툰 바느질 솜씨를 짐작하게 하는 비좁은 암 홀이 불편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몸에 꼭 맞게 익숙하다.  세상에 딱 한 사람 나만의 소장품인 검정 조끼는 추운 계절을 포근하게 나는데 1등 공신 필수품이다.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할 때면 맨 먼저 꺼내 입다가 맨 나중에 벗는다. 까탈스러운 언니가 아무리 쌀쌀맞게 나를 째려봐도 언니는 내게 한결같이 포근한 사람이다. 따스한 검정 조끼와 함께하는 한.


자연이 온기를 다루는 방식은 이치를 깨닫게 한다. 폭염에 갇힌 여름의 도시를 탈출해 빽빽한 숲에 들어서면 서늘한 그늘 바람이 열기를 식혀준다.  땅이 꽁꽁 얼어도 생명의 바닷물은 얼지 않고, 지상의 헐벗은 동물은 땅 속 동면으로 최소의 온기를 흙에 의지한다. 문명 이전에는 인간도 겨울이면 동면에 들었다고 한다. 현대의 인간이 욕망한 온기는 풍요를 넘어 과잉을 넘어 병폐를 낳았다. 내가 따스함에 탐닉하는 사이, 동면의 전설을 빼앗긴 어떤 이는 골판지 한 장에 몸을 맡긴 채 노상에서 겨울밤을 지샌다. 인간 세계 온기의 부조화가 갱년기 내 몸을 닮았다.


연말이 되자 우리 동네 네거리에도 사랑의 온도탑이 세워졌다. 무심히 냉소하며 매일을 지나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빨간 꼭지는 그새 두어 뼘쯤 달아올랐다. 누구의 온기일까?

나에게 묻는다. 오늘도 따스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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