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과 함께 하는 주말. 폐렴에 걸린 아이가 틈만 나면 심심하다고 보채고 세 식구의 식사 시간은 끝없이 반복되어 돌아오지만, *긍정적이면서도 올곧고, 사랑스러운 성격을 가진 고등학생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를 보거나 *갑작스레 한 식구가 되어버린 이모와 조카가 서서히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만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해독되는 기분이 든다. 크게 폭소하거나 오열할 일은 없지만 화면을 응시한 채(전자책으로 보는 중) 잔잔하게 미소를 띠거나 남몰래 눈시울을 붉히는 주말은 그야말로 평화의 시간이다. 잠들기 전에 읽기 시작한 만화책 한 권에 잔잔하던 내 마음이 뜨겁게 뛰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느린 유속의 강물을 바라보는 상태와도 같은 시간을 보내던 주말이었다.
‘아무리 직장 일로 피곤한 날이어도... 밤늦게 야근한 날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800글자 수업을 반복했다.’
‘800글자 수행을 이어 가면서 조금씩 장편도 쓰기 시작하여... 드디어 1만 자 소설을 완성시킬 수가 있었다.’
라니, 열의가 넘치는 것 만으로는 모자라 피나게 노력해서 바라던 장편 소설을 완성까지 해내는 만화책 속 캐릭터로 인해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리 재능은 노력을, 노력은 덕력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저이에 비하면 나의 열정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싶은 마음에 겉으로는 미간을 찌푸리는 정도로 그쳤지만 속으로는 마치 만화 속 캐릭터가 된 듯 책상을 마구 내려치며 울부짖고 싶은 기분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여태껏 저렇게 노력하지도 않고 뭘 했나.’
자괴감이 드는 동시에, ‘저렇게 노력하면 진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희망이, 그리고 ‘저렇게까지 노력할 수 있다니’하는 동경심까지 복합적으로 내 안에서 휘몰아치자 서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800자 단편소설을 세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완성해 가며 글쓰기 훈련에 돌입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 만화의 이름은 [동인녀의 감정]. 한동안 SNS에서 화제가 됐던 만화다. 유명하다고 하니 언젠가 한 번 찾아봐야지 생각을 했지만 ‘동인지’에 대한 정보나 관심이 별로 없었던 터라 존재를 잊은 채 몇 달을 흘려보냈다. 주말 동안 앞서 읽은 두 만화를 결제하고 남은 캐시를 보며 뭘 보면 좋을까 고민할 때까지도 잊고 있다가 장바구니를 보며 다시 [동인녀의 감정]과 마주했다.
[동인녀의 감정]은 다수의 동인녀가 등장하는 만화다. 표지를 장식한 핵심 캐릭터인 ’*글러’ 아야시로를 중심으로 여러 글러가 등장하는데 *소비러에서 글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부분이 내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동인지에 대한 지식이 없고 그 문화에 대해 자세히 아는 부분이 없어 전체적인 내용상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적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캐릭터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핵심 캐릭터이자 인기 글러인 아야시로 역시 성실하게 작품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라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그보다는 생초보에서 인기 있는 글러로 성장해 나가는 캐릭터들에게서 더 큰 자극을 받은 것은, 내 안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인기 있는 글쓴이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질투를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동경하는 마음을 품게 된 건 그들이 노력하는 장면에서 느껴진 뜨거운 감정, 열의, 애정 같은 걸 공감할 수 있어서였다. 스포가 될 수 있어 모든 캐릭터가 어떤 연유로 글러가 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성장했는지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뜨거운 애정과 열의에 나도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나도 할 수 있다. 하루 800자, 단편소설 나도 써보는 거야!'
순간이지만 진짜 매일 단편소설을 쓸 거처럼 의욕이 불타오르기도 했다. 자는 동안 그 마음은 차갑게 식어 월요일을 맞이하자마자 다시 놈팽이처럼 소파에 누워 핸드폰이나 뒤적거리는 짓을 반복했지만 그래도 동인녀가 떠오를 때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 역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덕질을 하고 게임도 조금 했지만 매일 소설은 아니더라도 뭐라도 글을 쓰자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몸을 끌어당겼다. 동인녀들은 아야시로로 인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나는 어제도 오늘도 동인녀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언젠간 나도 인기 있는 글러, 아니 글쓴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킵과 로퍼]
*[위복가족]
*글러 : 문장으로 동인 활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출처 : [동인녀의 감정] ‘이 만화에 나오는 용어집’)
*소비러 : 동인계에서 소설이나 그림 등의 작품을 투고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출처 : [동인녀의 감정] ‘이 만화에 나오는 용어집’)
*동인지 : 사상, 취미, 경향 따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편집, 발행하는 잡지.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동인녀의 감정]에서는 원작이 있는 만화나 소설을 2차 가공한 글이나 만화를 뜻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