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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May 12. 2023

지루한 행복

‘아,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매일이 즐겁고 행복했던 때는 어디로 사라졌지?’

한때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즐거움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졌다. 최근에 느낀 재미는 뭐였지, 하는 자문에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볼륨 3>와 만화 <마담들의 룸셰어(マダムたちのルームシェア)>, <80세 마리코>를,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오는 영상을  보며 입까지 벌리고 미소 짓고 있는 스스로를 알아차린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소소한 재미가 일상의 즐거움이나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씁쓸한 사실마저 덩달아 떠올렸다.


예전에는 매일 잠들기 전에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했다. 요즘에는 ‘오늘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만 기도를 한다. 예전에는 그저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아, 오늘 하루도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뭘 해도 그냥 그렇다.


아마도 그 쯤부터였을 거다. 부모님 집에서 지내던 반려견이 우리 곁을 떠났을 때말이다. 그 이후로 내내 이 지경인 거 같다. 어쩌면 반려견인 낫또는 혼자서만 일찍 떠나게 된 것이 외롭고 억울하여 누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자기가 대신 가져가 버린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일 텐데, 매일이 즐겁고 행복했던 나니까 낫또가 하늘에서 혼자 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생각하면 나도 더 이상 재미니, 즐거움이니, 행복이니 더 집착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다.


이십 대에는 꽤 오래 우울했다. 낫또를 만나고 아이를 낳으면서 우울과 작별하고 매일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낫또가 가져온 행복을 낫또가 수거해 갔다고 해서 다시 우울해질 건 아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지금의 상태가 좀 낯설다. 이런 걸 슬럼프라고 부르는 걸까. 글을 써도 죄다 마음에 들지 않고 낮이고 밤이고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를 보거나 졸거나 하는데 이런 나날이 반복되면 다시 우울증이 올 거 같기도 하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글을 쓰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걸까, 싶다가도 안 쓰다 보면 영영 못 쓰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억지로라도 정해진 요일마다 글을 쓸 때가 더 행복했던 거 같은데 그때의 일상이 행복을 느끼게 한 건지, 글쓰기가 행복을 준 건지, 것도 아니면 그냥 나의 마음가짐이 그랬던 건지 기억이 흐릿하여 답을 찾지 못하겠다.


오늘은 손 대신 머리로만 글을 쓰며 가만히 모니터 앞에 앉아 유튜브를 보느니 요리를 하기로 했다. 한동안 몰입해 있던 게임은 어제부터 조금 시들해졌다. 아니 시들해진 척하기로 했더니 진짜로 조금은 흥미가 사라졌다. 어제저녁에는 함박스테이크를 제법 맛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도 요리를 하다 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거 같았다. 아침 겸 점심인 고구마튀김, 아이에게 만들어주기로 한 레몬 쿠키, 그리고 저녁에 먹을 돈가스까지 이참에 미리 만들어 놓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요리는 재미가 없었다. 고구마튀김은 탕수육옷을 입은 고구마가 되었고, 레몬쿠키는 어느 것 하나만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식감도, 맛도 별로인 상태가 되었으며, 돈가스는 뭐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았지만 조금 짰다. 아마 셋 중 하나라도 맛이 있었으면 기분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잊고 있었던 지루함이 허기가 사라지는 시점부터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재미없다,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니 정말로 모든 것이 더욱 재미 없어지기 시작한다. 긍정적인 최면보다는 부정적인 최면이 더 효과가 있는 걸까. 분명 반대라고 여겼는데 이상하다. 그래도 어제는 자기 전에 ‘행복’에 관한 기도를 했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잊고 있었지만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무탈함에서 오는 지루함조차도 축복이자 행복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미가 없고 지루해도 지금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굳이 내 삶에 불행을 초대하고 싶지는 않다.


양가 부모님이 건강하고, 아이와 우리 부부 역시 건강하고, 사건, 사고 없이 평범한 일상을 살며 글을 쓰려고 하면 쓸 수는 있는 지금의 상태를 예전에는 행복이라 여겼다. 어떤 기분 좋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불행하다 여길 일이 없는 것이 그저 감사하고 행복했는데 그걸 잊고 지냈다.


"지루하다. 재미없다. 졸리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행복한 거다. 우울함에 굳이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돼서, 당장 감당하고 처리해야 할 사건, 사고가 있는 게 아니라서 그저 평범하게 '지루해.'하고 엄살 부릴 수 있어 어쩌면 어제도, 오늘도 나는 행복하다. 어쩌면 내일도 행복할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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