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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Aug 22. 2023

흰 죽보다는 달걀죽



오랜만에 공연 보러 가는 길, 고대했던 만큼 설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공연장에 일찍 도착한 후로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쭈욱 기운이 없다. 며칠 전 더위를 식히려 마신 아이스티 한 잔이 이렇게 체력을 갈아먹을 줄은, 실은 조금은 걱정하긴 했지만 뒤탈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이럴까 봐 평소 차가운 음료나 간식은 잘 먹지 않는다. 목이 약한 편이라 차가운 걸 먹고 나면 곧잘 목이 붓고 아프다. 아이스티를 마신 저녁부터 하루가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갔지만 그렇다고 공연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공연을 보는 내내, 세 시간이 조금 넘도록 환호성 한 번을 내지르지 못한 채 손바닥이 붓도록 박수만 신나게 치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잘 시간도 아닌데 식구들이 자고 있다. 내 소리에 잠깐 깬 남편에게 물어보니 아이는 진작부터 자고 있었단다. 어째서 남편의 육아는 내 육아보다 편해 보이는 걸까. 아이는 내가 외출할 할 때면 밥도 더  잘 먹고 잠도 일찍 잔다. 뒷정리가 제대로 안된 부엌을 보니 두 사람은 저녁식사로 치킨을 먹은 모양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내 것은 남겨두질 않았다. 서운할 수도 있지만 실은 치킨을 먹을 형편도 안된다. 목통증도 통증인데 집에 도착한 후로 피로가 몰려오는 데다 공연 중간쯤부터는 배도 아팠다. 아이스티 한 잔에 목도, 체력도, 장도 약해지다니 대가가 너무 크고 가혹하다.


배가 썩 고픈 건 아니지만 얼른 나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할 거 같아 씻고 나와선 냄비에 물을 받고 냉장고에 넣어둔 밥을 꺼낸다. 물이 적당히 찬 냄비에 찬밥 절반과 코인육수 한 알을 넣고 그대로 끓여 죽을 만들 셈이다. 물이 증발하도록 뚜껑을 열고 뽀글뽀글 끓이는데 코인육수가 간을 맞춰줄 거 같아 따로 간도 하지 않고 달걀만 한 알 풀어서 넣는다. 참기름도 한 방울 넣으면 더 맛있겠지만 배가 아플 땐 참기름도 무섭다. 실은 달걀도 무서운데 쌀만 가지고는 기력이 날 거 같지 않아 넣었다.


어릴 땐 아프면 엄마가 쒀준 흰 죽에 간장을 섞어 비벼 먹었다. 엄마는 열이 나거나 체하거나 배탈이 나면 찹쌀을 불려 흰 죽을 만들어 주었다. 달걀 죽은 가끔씩 내가 요구할 때만 만들어주고 건강상태와 상관없이 삼계탕을 끓일 때마다 남은 국물에 다진 채소를 넣어 죽을 만들었다. 나는 달걀죽을 더 좋아해서 혼자 죽을 끓여 먹어야 할 상황이 오면 언제나 달걀죽을 끓이지만 닭채소죽도 좋아해서 가끔 삼계탕이나 백숙을 만들 때면 엄마가 그랬던 거처럼 채소죽으로 마무리할 때도 있다.


요즘은 죽보다는 누룽지를 더 자주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죽을 만들어 먹는 건 오랜만이다. 부모님 집에서 함께 지내며 끓여주는 죽을 받아먹기만 했을 땐 그저 간편한 식사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일본에서는 죽이 의외로 정성이 들어간 요리라고 하여 좀 놀랐다. 기력 회복을 위해 육수를 내고 쌀을 불려 오랫동안 끓여서 만드는 죽에는 들어가는 재료도 다양하여 그때만 해도 아플 땐 흰 죽이나 달걀죽이나 먹던 내게는 조금 생소한 일처럼 다가왔다(물론 일본에도 흰 죽이나 달걀죽이 있고,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십 대 초반에만 해도 죽은 맹물에 불린 쌀을 넣고 끓인 간편한 요리라는 것이 내가 가진 이미지였기 때문에 정성이 들어간 하나의 '요리' 취급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결혼을 하고 난 후로는 몸이 허한데 입맛도 없을 때마다 죽집에서 소고기채소죽을 시켜 먹었다. 아이가 태어나 이유식 후기로 접어들 즘에는 죽을 시켜 나눠먹기도 했다. 아이가 더 자라고 죽을 잘 안 먹기 시작하면서 뜸해졌지만 기억엔 없어도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아마 죽을 시켜 먹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위가 안 좋았던 올초에는 죽이 아닌 누룽지만 아침으로 챙겨 먹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직접 죽을 끓여 먹으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 역시 내 입맛에는 누룽지보다는 죽이 좋다. 하얀 쌀과 물을 바탕으로 노란 달걀이 뒤섞인 것이 제법 예쁘기도 하고 식감도 더 부드럽다. 누룽지만큼 고소하지는 않지만 내가 만들었을 때 특유의 밍밍한 맛도 좋다. 이번엔 코인육수 한 알에 비해 밥양이 적었는지 조금 짭짤한 기운이 입안에 맴돌기는 하지만 그래도 파는 거에 비하면 여전히 심심한 편이었다.


죽 한 그릇을 먹고 쉬는데 기운은 나도 목에 생긴 염증을 위한 약은 따로 챙겨 먹은 게 아니다 보니 목통증에 이어 기침이 나오고 기침이 심해지자 앉아있음에도 먹은 죽이 역류하여 올라온다. 공연 때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입을 틀어막았는데 집에서도 기침을 할 때마다 입을 틀어막는다. 여러모로 입을 틀어막을 일이 많은 하루. 입만 막는다고 올라오는 음식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위장을 위한 약을 얼른 챙겨 먹고 그 후로도 소화를 시키기 위해 한참을 더 앉아 있다 잠자리에 든다.


공연이 있던 것은 토요일, 그리고 이제 오늘은 화요일이다. 며칠이 지났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달걀죽을 만들어 끼니를 해결한다. 이제는 참기름도 넣고 궁채장아찌를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약을 먹은 덕분인지 그 뒤로 소화도 잘되고 배도 안 아프지만 여전히 입맛이 없고 종일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죽을 가장 자주 만들어 먹는다. 목에도 자극을 주지 않고 바로 누워 잠들어도 다른 음식에 비해 부담이 덜하다. 내일부터는 아마도 달걀죽이 아닌 다른 걸 먹을 거다. 어제 병원에 다녀온 후로는 목통증도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다른 증상들은 아직 남아있지만 이제는 든든하게 챙겨 먹고 몸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다. 한동안 달걀죽을 실컷 먹었더니 내일은 오랜만에 갓 지은 밥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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