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선물을 사기 위해 동래에 있는 백화점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갈 때는 고속도로를 이용했지만 돌아올 때는 정체가 심하지 않아 일반 도로로 가기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릴 때 자주 들리던 곳을 지나게 됐다. 딱 지금 내 아이의 나이 정도였을 때, 나는 감기를 달고 다녔던 터라 걸핏하면 엄마와 아파트 셔틀버스를 타고 동래시장 근처에 있던 병원과 약국에 가야 했다. 그때 다니던 병원은 이미 다른 병원으로 바뀐 지 오래였지만, 차를 타고 지나며 보니 꽤 오랫동안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약국마저 최근에 허물어졌는지 같은 자리에서 새로운 건물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병원과 약국에 갈 때면 시장에 들러 장을 보기도 하고 간식을 사주기도 했는데 겨울이면 땅콩과자나 국화빵을, 그리고 여름이면 옥수수를 사줬다.
그때 먹던 샛노란 옥수수는 알이 쪼글쪼글해서 그것보다는 심을 쪽 하고 빨았을 때 나오는 달달한 즙을 더 좋아했다. 달달한 걸로 따지면 통조림 옥수수 쪽이 더 달지도 모르지만 사카린을 넣고 삶은 시장표 옥수수는 노랫말처럼 하모니카 연주하듯 두 손으로 들고 먹는 재미가 있었다. 알갱이 구석구석 벤 물기가 바닥으로 떨어질까 키친 타올로 옥수수의 절반 정도를 감싼 채 먹다 보면 어느새 타월도 두 손도, 입 주변도 축축해졌지만 알맹이를 다 먹고 남은 옥수수심은 내가 얼마나 쪽쪽 빨아먹었는지 메마른 상태가 되기 십상이었다.
쭈글쭈글 노란 옥수수보다 찰옥수수를 파는 곳이 많아지면서 옥수수와는 점점 멀어졌는데 여름에는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과일이 많아 그런지 다소 심심한 맛의 옥수수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 뜨개질 모임에 갔다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일본 홋카이도의 토우키비 옥수수를 처음 먹어보게 되었는데, 톡톡 터지는 식감이나 향긋한 단맛이 과연 채소보다는 과일맛에 가깝다는 사람들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뜨개 모임에는 일본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홋카이도 출신이라는 걸 듣고 옥수수 얘기를 꺼냈던 게 계기가 되어 한국의 한 카페에서 토우키비 옥수수를 맛볼 수 있었던 특별하고 감사한 경험이었다.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 옥수수는 맛이 없다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한때 마약 옥수수라는 것이 유행을 하고 초당 옥수수가 보편화되면서 우리나라도 맛없는 옥수수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많이 옅어진 듯하다. 여름이 시작되면 제주에 있는 농장에서 초당옥수수를 주문해 먹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 년째가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지역의 특색에 따라 옥수수를 골라 사 먹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초당옥수수를 선호하는 틈에서 누군가는 찰옥수수를 고수하며 마니아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철저한 초당옥수수파로 초당옥수수는 돈을 주고 사먹지만 찰옥수수는 누군가가 주지 않는 이상 잘 먹지 않는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초당옥수수를 시켰는데 올해는 예년만큼 맛이 있지는 않아 미루다 보니 결국 하나 남은 것에 곰팡이가 생겨버렸다. 이대로 올여름 내내 옥수수를 먹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남편이 찰옥수수 한 봉지를 얻어오는 바람에 집에 또 옥수수가 생겼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남편 직장 근처에서 옥수수를 쪄서 판매하는 분이 매년 옥수수를 조금씩 줬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받은 그날 바로 냉장고에 넣은 채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 도저히 기운이 없어 밥도 차릴 수 없는데 뭐라도 먹어야 될 거 같아 고민을 하다 보니 냉장고 속 찰옥수수가 떠올랐다. 이미 찐 상태로 온 거라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리기만 하면 됐는데, 봉투 속 가장 작은 옥수수를 골라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운 후 곧바로 입에 넣어보았더니 '세상에 찰옥수수의 껍질이 이렇게 얇고 쫀득할 수가 있다니'라는 생각에 눈이 번쩍 떠졌다. 껍질이 얇아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간도 잘 베있고 조금도 싱겁거나 무(無)맛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옛날에 먹던 사카린 옥수수 맛과는 다르지만 또 다른 옥수수의 세계가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찰옥수수파는 어쩌면 이 맛을 알기에 찰옥수수를 고집하는 걸지도, 내가 지금껏 찰옥수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이 맛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걸 이 옥수수를 먹는 순간 알았다. 입맛도 기운도 없어 대충 배만 채우자던 조금 전의 나는 결국 냉장고에서 두 개의 옥수수를 더 꺼내 먹은 후에야 만족을 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는 외국인 친구가 한국의 옥수수차를 두고 이해할 수 없다며 글을 올렸다. '옥수수차가 왜? 얼마나 맛있는데?' 하며 약간은 조롱하듯 올린 그 글에 마음이 상해하던 것도 잠시, 옥수수차가 맛있다는 증언을 해주는 댓글들과 함께 다른 나라에도 옥수수차가 존재한다는 글이 연이어 달리자 게시물을 올린 당사자가 머쓱해하는 걸 보았다. 먹어 보기 전까지는 편견이 있을 수도, 한두 번의 경험 만으로는 싫어질 수도 있는 것이 '맛'에 대한 흔한 평가이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맛있는 걸 먹으며 살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새로운 것을 먹어 보거나, 싫어했던 음식에도 다시 시도를 해보는 편이 좋을 거 같다. 한때는 우리나라 옥수수가 맛이 없다고, 그리고 최근까지는 초당옥수수가 제일이라고 여겼는데 올해만큼은 찰옥수수가 승자다. 매년 이 맛을 경험할 수 있다면 이대로 나는 초당옥수수파에서 찰옥수수파로 변절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