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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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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Jan 10. 2024

겨울 무는 특별해

베처럼 달고 참외처럼 아삭한 겨울 무


김장하는 날이면 엄마는 언제나 ‘무 한 번 먹어 봐라. 배보다 맛있다.’ 말하며 무 한 조각을 건넸다. 벌린 입에 쏙 하고 넣어준 무는 배만큼 달거나 부드럽지는 않아도 더 시원하고 아삭하며 단맛이 났다. 요즘은 계절에 관계없이 과일이나 채소를 구할 수 있지만 겨울 무를 먹을 때면 ‘역시 제철의 맛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지’ 생각한다.


여름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던 무의 맛은 겨울이 시작되면서 탈바꿈한다. 칼로 썬 단면이 매끄럽고 이로 씹으면 아삭한데 씹을 때마다 단맛이 올라와 생으로 먹어도 살짝 알싸한 정도의 매운맛만 남는다. 무엇을 만들어도 맛있는 시기라 누군가 무를 준다고 하면 사양하지 않고 가져와 국도 끓이고 나물도 무치고 조림도 만든다. 한 여름 빨간 양념에 자작하게 졸인 무 조림이 먹고 싶어 만들었다가 얼마 먹지도 못하고 남긴 적이 있다. 양념이 아무리 맛있어도 무에서 배어 나오는 쓴맛을 감출 수 없고 오랜 시간 푹 익혀도 입에 넣는 순간 녹아버리는 대신 혀 위에 심을 남겨 버리는 것이다. 겉으로 보는 모양새는 같은데 맛이나 식감이 이리도 다를 수가 있을까. 무가 들어간 요리는 사계절 내내 먹고 싶지만 그 후로 여름 무는 되도록 반찬을 만들기보다 육수를 위한 것만 챙겨둔다.


이번에는 아주 오랜만에 엄마의 김장을 도왔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돕고 한 번도 도운 적이 없으니 반올림을 하면 거의 십 년만의 일이다. 어릴 때는 엄마가 소금에 절인 배추를 헹굴 때 옆에서 거들고 무를 썰고 양념을 치대는 것만 하고도 김장을 다 했다 여겼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말 그대로 거드는 것뿐이다. 그래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몇 년 간 살림을 했다고 김장을 위해 들어가는 품이 대충 보인다.


불 앞에 서서 재료를 익히기만 하면 그게 요리인 줄 알았던 거처럼 배추에 양념을 치대면 그것이 김장인 줄 알았는데 이 날 하루를 위해 엄마가 여기저기서 공수한 재료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 일이 왜 일 년 중 큰 행사가 될 수밖에 없는지 수긍하지 않기가 어렵다. 김치의 양을 떠나서 취향에 맞는 배추를 구할 수 있는 판매처를 고르고 간수가 빠져 짠맛이 적당하고 단맛이 살짝 올라오는 소금을 준비하는 것뿐 아니라 속에 넣을 재료를 정해 때맞춰 신선한 것들로 마련해 두는 일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연륜과 경험이 쌓이면서 이제는 시장이나 마트뿐 아니라 지인 혹은 지인의 지인이 수확하거나 생산한 재료들도 적지 않는데 그런 재료는 나처럼 젊고 미숙한 사람은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 해가 갈수록 엄마의 김치는 재료만으로도 귀한 존재가 되어간다.


김장의 핵심은 배추와 고춧가루라 할 수 있지만 무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채를 썬 것은 보쌈김치와 굴김치의 속재료로 들어가고 큼직하고 투박하게 썰어둔 것은 김치통에 김치를 넣을 때마다 구석구석 끼워 넣어 푹 익을 때쯤부터 하나씩 꺼내 먹으면 별미다. 김장 직후에 먹는 김치 속 무는 시원함을 더해주기도 하지만 김치가 익어가면서 무의 단맛도 배어 나오기 때문에 배추 못지않게 무도 맛있는 걸 골라서 넣어야 한다. 묵은 김치 속 무 덩이는 배추와 다른 매력이 있어 그대로 꺼내어 앞니로 베어 먹어도 맛있지만 찌개나 조림에 넣어 먹으면 그냥 무를 넣어 만든 것과는 다른, 새콤함이 더해진 특별한 요리로 완성된다.


김장철이 지나고 한 겨울 추위가 이어지는 연초에는 꼬득꼬득한 식감의 무말랭이 무침을 빼놓을 수 없다. 한동안 보쌈김치와 굴김치만 먹어 질려가던 참인데 김장과 함께 받아온 엄마표 무말랭이 무침이 딱 알맞게 맛이 들었다. 엄마의 무말랭이는 집에서 직접 말린 거라 조금 더 크고 굵은 느낌이라면 얼마 전에 어머님에게 받아온 무말랭이는 얇고 긴 모양인데 엄마 거는 고추 잎도 들어가 같은 무말랭이 무침이라고 해도 다른 맛이 난다. 같은 무말랭이로 만든 무침이지만 양념맛도 다른데 식감이나 양념이 베인 정도가 달라 밥 한 숟갈을 떠먹을 때마다 요리조리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감기에 걸린 아이를 위해 무나물을 만들 예정이다. 갓 지은 백미밥에 푹 익혀 만든 무나물을 올리고 간장과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이면 소화력이 떨어진 아이도 잘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단맛이 나는 겨울철 무에 오래 묵힌 소금을 넣어 익힌 나물은 소박한 단맛이 난다. 무나물과 함께 배추 된장국과 손두부까지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당장 손두부를 구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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