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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네가 가는데 내가 왜 영어를

by 으네제인장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면 타이핑 웍스를 켜 타자연습을 하고 그다음으로는 넷플릭스에서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를 틀어 쉐도잉 연습을 한다. 왜 하필 하이틴 로맨스물이냐면, 좋아한다. 하이틴이 주인공인 드라마, 영화를. 그들은 최대 고민이 대학과 사랑이기 때문에 대체로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다. 덕분에 내 영어 실력이 별로 좋지 않아도 영어 자막이 있으면 이해하는 데에 크게 부족함이 없다.

영어 공부는 아이 첫돌 무렵, 1년 동안 육아를 열심히 한 보답으로 '스피킹 맥스'를 결제하며 시작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아기가 낮잠에 들면 영상을 보며 공부를 했을 것이다. 매일은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그쯤부터 '영어 공부를 해야지'하고 마음먹었다. 그 후로 '스픽'도 써 봤고, 올해에는 '듀오링고'를 결제해서 상반기에 열심히 해보았다. 앱 말고 문제집을 사서 풀어보기도 했는데 가장 효과를 본 건 원서 읽기였다. 처음 원서 읽기 모임에 참여했을 때 심정은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였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추측은 할 수만큼 진전이 있었다.

5년 간 공부 했다 그러면 엄청 늘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영어로 된 콘텐츠를 틀었을 때 5분을 버티지 못하고 끊는 대신 2, 30분은 참고 볼 수 있게 됐다. 이해한다가 아니라 어쨌든 지켜보거나 들을 수는 있을 정도. 하나도 모를 때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지겹고 머리가 아팠다. 가끔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곤경에 처해있는 걸 보고 바로 모른 척 눈을 피하지 않고 속으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통할까?'하고 영어 문장을 고민해 보는 정도, 요가 수업에서 자주 마주치는 영국인 수강생과 '각자' 언어로 짧은 대화를 겁먹지 않고 시도해 볼 정도로만 늘었다.

영어가 늘지 않는데도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애초에 큰 기대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당장 영어 실력이 좋아진다고 해도 쓸 곳도 없었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느낀 건 언어에 꾸준함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는 점이다. 서서히 늘더라도 영어에 흥미를 잃지 않으며 매일 조금씩 공부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목표였고 다행히 잘 이어지고 있다. 평일 몇 페이지씩 원서를 읽기만 했지 문법이나 단어를 제대로 공부한 건 아니라 SNS에 올릴 영어 문장을 만들 때도 구조적으로 고민을 하기보다는 그냥 느낌 대로 써내려 간 다음에 챗지피티에게 교정을 받는다. '내가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나' 싶지만 떠오르는 대로 쓰다 보면 자연스럽거나 완전히 올바르지는 않아도 문장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하는 것은 원어민처럼 영어에 능숙해지는 일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든 영어라는 언어도 도구로 활용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쨌든 쫄지 않고 문장을 만들어 가거나 내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다음 목표다.

아이는 우리말을 배우느라 바쁘다. 평범한 또래 아이들처럼 어휘량도 적고, 글을 바르게 쓰는 것도 어려워한다. 내가 배움이 느리다 보니 아직 우리말 만으로도 버벅거리는 아이에게 새로운 걸 시키기가 조심스러워 영어는 아직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 아이도 영어 공부를 하는 일이 즐겁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데 그냥 공부를 시켜버리는 것보다 즐거움을 알려주는 일이 더 어렵다. 그건 내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를 보고 스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니까.

한동안 영어 공부에도 슬럼프가 왔다. 한 번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온다. 조금 늘었다 싶으면 그다음에 바로 실망하는 순간이 따라온다. 예전에는 들리지 않던 문장이 들리거나, 읽을 수 없던 문장을 읽거나 표현할 수 없던 문장을 써 내려가면서 강렬한 보람을 느끼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을 또 원하게 되지만 스스로 성장을 깨닫는 순간은 그렇게 자주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하고 흥미를 잃어버린다. 그럴 땐 어김없이 공부를 잠깐 쉬고 잊고 지내다가 다시 아무 기대감 없이 할 수 있을 때 다시 시작한다. 뿌듯해하고 실망하는 과정까지도 영어 공부 루틴 중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이제는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언제든 그만두고, 또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하는 쉐도잉은 단순한 문장을 따라 읽는 정도라 이것이 공부가 맞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오지만 이것 또한 몇 개월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늘었다!'하고 뿌듯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후에는 또 조급해하다 실망하는 날도 오겠지만 그러면 또 쉬다가 하면 되니까 괜찮다. 아이에게 영어 공부가 주는 즐거움은 아직 전하지 못했지만 어느 배움이든 성장과 실망하는 시기를 갖는다는 말은 전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영어공부도, 글쓰기도, 한국무용도, 요가도 심지어 육아조차도 다 그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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