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부터 3월 초
겨울 내내 먼나무 끝에 맺혔던 빨간 열매가 어느덧 바닥에 얼룩을 남기고, 복슬거리던 털머위 씨앗마저 흩어진 겨울 끝무렵. 만개했던 애기동백이 조금씩 시들고 매실나무에는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새해를 맞이하고 어느덧 2월에 들어서면 겨울과 봄의 기운이 서로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드디어, 봄. 아니, 아직은 겨울. 봄과 겨울이 공존한다는 건 반대로 겨울도, 봄도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매일 같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자연도 드물게 변화를 멈춘다. 마치 얼음을 외친 어린이처럼 '땡'하고 봄이 오길 기다리며 길가의 식물들은 숨죽인 채 가만히 얼어붙어있다.
2월은 일 년 중 가장 지루한 시기다. 1월에는 잎을 떨군 마른 가지 틈을 기웃거리며 아이와 탐조에 나섰다. 추위는 여느 때보다 매서웠지만 양쪽 외투 주머니에 손난로를 하나씩 넣고 마스크를 낀 채 도서관 옆 개울가를 따라 백로와 할미새, 노랑할미새와 흰뺨검둥오리, 천둥오리를 살폈다. 가끔은 겨울 바다에 나가 붉은부리갈매기 떼 사이를 걸어 다니고 물아래로 잠수하는 물닭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기도 했다. 어린이가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니 새를 보고 함께 방방 뛰며 반가워해 줄 산책 메이트가 없다. 추운 날씨에 외로움까지 더해져 몸을 움츠린 채 외출을 미뤘다. 어차피 나가봐도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 며칠째 이어지는 걸. 식물도 멈추는데 나도 잠시 멈춰도 괜찮지 않을까.
설 연휴가 지난 후로는 즐겨하던 산책도 마다하고 그저 누워서 시간을 보낸다. 우울한 걸까, 아니다. 다만 조금 지루하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지켜보고 있지만 동백 꽃봉오리도, 목련 꽃봉오리도 처음 봤던 모습 그대로다. 따뜻한 털옷을 입은 채 잔뜩 움츠린 꽃봉오리를 보며 나도 잠깐 쉬기로 한다. 자연이 가장 숨죽이는 시기는 한 겨울이 아닌 봄이 오기 직전. 나도 새 연재를 앞두고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욕심도, 걱정도 비우고, 그저 충분히 먹고 오래 자고 너그럽게 웃으며 봄을 기다리기로 한다.
내가 집에서 웅크려 지내는 사이, 자연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매실나무에 맺혀있던 하얀 봉오리들이 하나둘 꽃 피운 것이다.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본가 근처 매실나무 밭으로는 만개한 매화를 보려고 인파가 몰렸다. 우리 동네에는 한 그루가 설 연휴에 맞춰 만개했고 나머지는 그 후로 한 그루씩 개화하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다른 해에 비해 개화 시기가 조금 늦었는데 올해에는 그전과 비슷하게 폈다. 연휴 끝에 풍어제를 보기 위해 찾은 바다에서는 오랜만에 등에를 만났다. 이게 얼마 만인지. 작년 겨울 초 무렵 털머위 주변을 맴돌던 등에들이 추위가 사그라들자마자 돌아온 것이다. 집 근처에서는 아직 보기 어려워도 햇살이 따뜻한 바다 근처로는 등에 활동이 먼저 시작된 듯하다.
매화의 후발주자로 꽃을 틔운 건 바로 산수유. 서향과 회양목에서도 봉오리가 올라오는 중이다. 잘린 장미 가지 끝으로는 잎순이 올라오고 땅에서는 쑥과 함께 돌나물도 고개를 내밀었다. 애기동백은 거의 다 시들었지만 어쩌다 만개한 경우가 있고 동백 중에서도 이따금 한 송이씩 꽃이 보인다.
모감주나무, 은행나무, 회화나무는 이제 마지막 씨앗 뿌리기에 나섰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서며 겨우 봄을 맞이했지만 나무 바로 아래에 인도나 도로가 있을 경우에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조금이나마 번식 가능성을 높이려고 씨앗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떨군 씨앗이 흙바닥에는 닿지도 못한다는 걸 알면 얼마나 허무할까.
나무 중에는 씨앗뿐 아니라 마른 잎을 달고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참나무다. 더글라스 탈라미가 쓴 [참나무라는 우주]에 의하면 참나무는 제일 마지막까지 잎을 떨구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일지 궁금하여 겨울 내내 우리 동네 참나무들을 지켜보았더니 정말로 수많은 나무 중 참나무 만이 가을부터 지금까지 느리게 잎을 떨구고 있다. 한 번에 다 떨구고 푹 쉬는 편이 훨씬 편했을 텐데 저렇게 서서히 잎을 떨군 참나무 덕분에 이제 막 깨어나는 벌레들은 어렵지 않게 은신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월이 오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요즘은 동네를 걸어 다니며 봄의 흔적을 찾느라 분주하다. 일 년 중 동네 자연 관찰을 쉴 수 있는 시기는 봄이 오기 직전인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자연 관찰 만으로도 이렇게 바쁜 일 년을 보낼 줄 미처 몰랐다. 다행히 인간 세상에 비하면 자연은 급변하지 않는다. 한동안 쉬었던 만큼 잎순과 꽃순도 조금씩 차례대로 올라온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그때부터는 자연도, 관찰자도 일 년 중 가장 활발한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올해의 자연 관찰도 이제 시작. 자연관찰이라고 해서 여유롭고 느긋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해다. ‘얼음’하고 멈춰 선 자연을 보고 눈치껏 따라 쉬지 않았다면 이대로 일 년 내도록 쉼 없이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고 딱 자연만큼만, 자연 따라 쉬고 자연 따라 움직여보기로 한다.
왼쪽 위부터 본가 근처 매화밭, 회양목, 산수유, 돌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