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최애는 하프물범

우연히 열어 본 게시물에서 만나 한눈에 반해버린 하프물범

by 으네제인장




밀가루 반죽을 둥글게 뭉쳐 길쭉하게 늘린 다음, 민들레 홀씨 마냥 보드라운 털로 전체를 감싼 듯한 모습의 새끼 하프물범이 넓게 펼쳐진 눈밭 위에 누워있다. 눈으로 뒤덮인 땅도, 온몸을 감싼 털도 모두 새하얀 탓에 하얀 반죽 위에 동그랗고 새까맣게 찍힌 눈과 코가 아니면 눈밭에서 새끼 하프 물범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하프물범은 회색 몸에 하프를 연상하게 하는 무늬가 있다고 하여 하프물범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추위에 강하고 방수도 잘 되는 하얀 솜털로 촘촘하게 뒤덮여 있다. 포식자인 북극곰이 하얀 털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새끼 하프 물범 역시 하얀색을 띠고 있는 것은 적의 눈에 띄기 어렵게 하기 위해 진화된 것일 테다. 다 자란 하프물범은 물속에서 먹이를 구하거나 여차하면 물속으로 도망을 칠 수도 있기 때문에 눈보다는 바닷속 빛깔과 비슷한 회색을 띠고 있지만 헤엄을 치지 못하는 새끼 물범은 북극곰이나 북극여우와 마찬가지로 하얀 털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프물범을 알게 된 건 2000년대 중반, 그 당시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돌고 있던 하프물범 게시물을 통해서였다. 털 안으로 스며들지 않아 마치 콩고물이 묻은 인절미 마냥 하얀 눈을 온몸에 묻힌 새끼 하프물범 사진을 시작으로 사냥꾼에 의해 가죽이 벗겨진 채 설원을 붉게 물들인 물범들의 사체 사진으로 마무리되는 게시물은 당시만 해도 부의 상징이자 인기 패션 아이템이었던 리얼 퍼 모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지금과 달리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리얼 퍼 모피가 인기였고, 해외 하이브랜드 패션쇼장 앞에서는 모피를 입은 이들을 상대로 시위 중인 동물보호단체의 모습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는 사만다가 모피를 입었다가 동물보호단체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에피소드가 나올 만큼 당시 패셔니스타 사이에서 리얼 퍼 모피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그에 반하는 동물보호단체의 목소리 또한 점점 커져가는 추세였다.


우리나라에서 하프물범 게시물이 퍼질 때 즈음 패션계에는 페이크 퍼 소재의 모피가 ‘에코 퍼’라는 별칭을 단 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스텔라 멕카트니는 하이브랜드에서는 흔하지 않게 페이크 퍼를 사용하는 디자이너로 패션지에 소개되었으며 우리나라 역시 동물이 희생되는 리얼 퍼 모피나 가죽 가방 대신 페이크 퍼나 천가방을 사용하자는 목소리들이 하나, 둘 등장하더니 ‘에코’라는 이름이 붙은 다양한 제품들이 유행처럼 인기를 얻기도 했다.


모피가 동물의 가죽이라는 걸 그냥 알고 있을 때와 눈(사진)으로 직접 보고 난 후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게다가 귀여운 새끼 동물의 사진으로 관심을 먼저 모은 다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동물의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은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즈음 일부에서는 모피에 이어 가죽 가방, 가죽 신발, 오리털 외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거나,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 브랜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비건식단을 시작하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때 하프물범은 오메가 3의 재료로도 인기를 끌었다. 지금과 달리 대형어류나 포유류로부터 추출된 오메가 3가 건강보조제로 주목을 받으면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하프물범 오메가 3’라는 문구를 발견하게 될 때도 있었다.


약 15년이 지난 지금 하프물범은 멸종위기 보호동물이라고 불리기 어렵다. 하프물범 게시물이 알려졌던 당시에도 리얼 퍼 모피가 동물 학대를 일으키는 것과는 별개로 하프물범을 포함한 극지방 동물들은 캐나다 정부에 의해 이미 보호를 받는 중이었다. 하프물범의 포식자인 북극곰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전 세계적으로 리얼 퍼 모피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과 더 이상 대형 어류, 포유류로부터 추출된 오메가 3이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하프물범의 개체수는 더욱 안정화되었다. 현재 하프물범의 주적은 북극곰이나 사냥꾼이 아닌 기후위기로, 하프물범뿐 아니라 극지방의 동물 전체가 높아지는 해수면과 녹아내리는 해빙 사이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15년 전과 상황이 달라진 건 하프물범에 대한 관심이나 개체수, 그리고 극지방 환경뿐만이 아니다. 페이크 퍼는 이제 여러 하이브랜드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미세 플라스틱이 발생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에코 퍼’로 불리지 않으며, 장바구니 형태의 천가방은 ‘에코백’이라는 명칭으로 정착하였으나 유행으로 인한 무분별한 소비는 환경에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는 기사들이 몇 년 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피나 가죽, 오리털 패딩 대신 코트를 입자고 하던 분위기는, 코트나 니트에 포함된 울, 캐시미어, 알파카 등의 소재 역시 동물 학대를 일으키며 그 외에 합성 섬유의 경우 미세 플라스틱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옷을 사기보다는 소비를 줄이거나 중고 의류를 사용하자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


대학에서 국제 환경에 대해 공부하던 때, 우연히 하프물범에 관한 게시물을 보게 됨으로써 환경에 대한 관심과 인간이 아닌 지구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다만 그때는 하프물범을 인간이 보호해야 할 동물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지금은 인간과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변화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에서 포식자는 우월한 존재가 아니며 그 역시 먹이사슬의 아래에 위치하는 생명체가 없으면 더 이상 생을 이어갈 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이어져있으며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서 함께 관계하며 살아간다. 지구 상에는 인간보다 더 빠르게 환경에 적응해 내는 생명체가 있고, 그 누구보다 먼저 터를 잡고 토대를 만들어주는 생명체도 있다. 지구별에는 인간과는 다르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생을 살고, 대를 잇고, 또 다른 종과 소통하는 생명체가 무수히 많다. 다른 생명체들을 알아가면서 인간이 거만하게 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어쩌면 인간 외에 것에는 무지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구별 위의 생명체에 호기심을 갖게 된 시작은 귀여운 외모를 가진 새끼 하프물범을 만난 것부터였지만 새로운 생명들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모든 종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매력과 특징에 놀라게 된다. 하프물범과의 첫 만남은 멸종위기 동물이라는 오해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하프물범이라는 동물에 특별히 더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건 이 모든 덕질의 시작에 하프물범이 있어서다. 지구별 생명체 덕질에도 첫사랑이 있다면 나의 첫사랑은 단연 하프물범일 것이다.



*정정이 필요하거나 피드백을 원하는 부분은 답글을 통해 남겨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