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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Apr 17. 2023

5월의 크리스마스





언젠가 카페에서 크리스마스티를 마신 적이 있다. 아직 어린 아가를 나 혼자 데리고 간 터라 짧은 시간에 얼른 마시고 나와야 하긴 했지만 긴장과 추위로 굳어버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던 향긋한 크리스마스티는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로 백화점에 갔다가 그때 마셨던 크리스마스티를 발견하게 되어 집으로 사오게 됐는데 분명 같은 브랜드의 크리스마스티임에도 불구하고 카페에서 먹었던 맛이 나지 않아 당혹스러워 했었다. 블렌딩이 달라진 거 같지는 않았고 아마도 차를 우리는 방식이 달라서 그런 듯 했는데, 카페에서 마셨던 티의 맛을 위해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차를 우려보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의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고 나는 큰 마음 먹고 사온 크리스마스티의 틴케이스를 어느새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카페에서 마신 맛이 아니어도 입맛에만 맞다면 어떻게든 마셔 없앨 수 있겠지만 집에서 마셔본 크리스마스 티는 어째서인지 입맛에도 잘 맞지 않아, 점점 케이스도 크고 케이스에 든 잎의 양도 만만치 않은 크리스마스티가 마치 비싼 돈을 주고 산 애물단지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결국 수납장 안 신세가 된 크리스마스티는 외면당한 채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차를 마시기 위해 수납장을 열면 부피가 가장 큰 크리스마스티는 언제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좀처럼 손이 가진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밀크티를 마시려고 수납장을 열었다가 크리스마스티 틴 케이스에 눈이 꽂히게 됐다. 

‘차이’

원래 차이밀크티를 끓이려면 홍차 잎에 따로 향신료들을 넣어줘야 하지만 문득 이미 향신료가 들어간 크리스마스티라면 간편하게 차이밀크티 맛을 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쌀쌀했고 알레르기 때문에 기침도 나오던 상황이라 생각난 김에 그 날 바로 크리스마스티로 밀크티를 만들어 마셔 보기로 했다. 

진한 크리스마스티에 따뜻한 우유는 기대했던 대로 잘 어울렸고 거기에 메이플시럽까지 넣어주었더니 단맛이 더 풍부해져 오후에 마시기 좋은 밀크티가 완성되었다. 아기는 잠이 들어있었고 나는 크리스마스티로 만든 밀크티를 느긋하게 마시며 오랜만에 카페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맛 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티는 향신료의 향이 생각나는 날, 으슬해진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싶은 날,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고 싶은 날에 마시기에 알맞은 티였던 것이다. 

카페에서 크리스마스티를 마셨던 날은 아기가 태어나고 혼자서는 처음으로 아기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던 날이었다. 아기가 추울까 싶어 아기는 따뜻하게 입혔지만 내 몸에서 나는 열기 때문에 혹시라도 아기가 땀을 흘리는 게 걱정이 되어 나는 얇은 겉옷만 걸치고 갔다가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그 날, 나는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는 다른 손님들 틈에서 서둘러 차를 마시면서도 오랜만에 가지는 티타임에 엄청난 행복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어쩌면 그 날의 크리스마스티는 그 날의 상황이 티를 더욱 맛있게 우려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서야 하게 됐다.

5월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아기가 낮잠을 잘 때면 크리스마스티로 밀크티를 마시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종일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오후가 되어 아기가 잠이 들고 나면 잠깐 생긴 여유에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면서 매일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시간을 가지곤 한다.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인 크리스마스처럼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티타임을 이제는 크리스마스티가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크리스마스티는 날이 더 더워지면 차가운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기에도 좋을 거 같아 앞으로 다가올 여름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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