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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Jul 13. 2020

작은 오븐이 준 행복

제주 시골마을 '식' 생활


처음 제주에 내려오면서 한 생각은, 간단한 요리를  일상처럼 매일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망은 이루어졌다. 이 곳에서의 스케줄이 지극히 '밥'에 중심을 두고 돌아가게 된 것이다. 한적한 시골이라 무엇인가를 사 먹을 밥집이 멀뿐 아니라 문도 일찍 닫는다. 그렇다면 집에 일찍 들어와 저녁을 준비할 수밖에. 그리하여 나는 늘 하고 싶었던 "나누어먹을 수 있는 요리"를 매일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오늘 삼시 세 끼와 내일의 저녁 메뉴가 급하다. 이틀 치 메뉴를 미리 정해두고 장을 본다. 늦은 오후 재료를 손질하고 그 날 먹을 메뉴를 만든다. 거창한 음식은 하지 않는다. 손도 느리고 초보라 자신도 없다. 그래서 간단한 요리부터 조금씩 시작한다. 에그 인 헬, 김치 감자수제비, 명란 크림 파스타, 카레나 김치볶음밥과 된장국까지. 종류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한다. 만들어지는 과정이 각각 아름답게 보인다. 카레의 노랑이나 토마토소스의 붉은색은 어찌나 선명한지? 보글보글 끓는 모습은 소리뿐 아니라 눈으로 보아도 예술이다.


다양한 요리를 좋아하지만 특히 선호하는 요리는 양식이다. 글쎄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요리라서일까. 스튜나 샐러드, 빵과 디저트가 좋다. 빵과 케이크는 20대 초반부터 즐겨먹었다. 작아도 소신 있는 빵집이거나 디저트 카페의 단골이 되곤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도 베이킹이 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베이킹에 관한 욕구는 반짝 떠올랐다가 홀로 오피스텔에서 살면서 곧잘 사라졌다. 굽자마자 혼자 먹는 것은 나에게는 재미도 맛도 없었으니. 방금 나온 따끈한 빵을 누군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베이킹을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제주에 오자마자 중고마켓에서 구매한 것은 미니오븐이다. 딱 원하던 적당한 사이즈에 새 제품이었다. 판매자 분이 선물 받아 오래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초보 베이킹을 시작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첫 개시는 바로 하와이안 피자. 전날 그림책에서 보았던 레시피대로 아주 간단하게 만들었다. 토르티야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파인애플을 잘라 올린 뒤 모차렐라 치즈를 올려 마무리. 예열 후 200도에서 10분 굽기. 이 간단한 레시피로 우리는 천국의 맛을 경험했다. 별 것 아닌 재료인듯 했지만 어우러졌을 때 어찌나 완벽한 맛을 내던지. 너나할 것 없이 입에 넣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맛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도 즐거웠으며 느리게 만들어지는 음식은 꼭 무언가를 천천히 키운 것 마냥 보람을 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오븐 요리는 다음과 같다. 시내에 나가야 있는 빵집에서 사 온 빵을 다 먹어버렸을 때, 메이트의 아침거리가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걸어 나가서 빵을 사 오기에는 비가 많이 온다. 그래, 오븐 베이킹을 도전하자. 목표는 가장 간단한 스콘이었다. 그런데 웬걸. 들어가는 재료도 간단하고 쉬울 줄만 알았던 스콘도 초보 베이커에게는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게 한 둘이 아니다.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를 체로 쳐서 내리고, 버터는 녹지 않게 차갑게 해서 자르듯 섞어야 한다. 휴지 시간도 길어질수록 식감이 좋아지니 꼭 그 시간을 챙겨주어야 하고. 아, 계량기가 없다는 것도 깜박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스푼으로 계량해야지 뭐.


그렇게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간신히 스콘을 네 개 구워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스콘을 마주할 때의 쾌감이란! 온 집에 고소한 빵 내음이 퍼지고 처음 쪼개 입에 넣은 그 따스한 달달함과, 잠에서 깬 메이트에게 개시했을 때의 희열 또한 잊을 수 없다.



사실 예전에는 몰랐다. 음식이란 때로는 혼자 어쩔 수 없이 때워야 하는 것이 되거나, 먹고 나서 후회하는 해로운 간편식일 때가 많았다. 밖에서 사 먹으면 사 먹는 대로 부담이고, 집에서는 건강하지 않은 간편식들로 금세 식사시간을 끝내고는 허전해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상적인 일이 이토록이나 큰 행복을 주다니. 천천히 걸어 나가 함께 장을 보고, 같이 만들어 완성된 음식을 음미하는 매일이 새롭고 좋다. 모두가 함께하는 저녁식사가 매일의 가장 중요한 스케줄로 등록되어 있기에 눈을 뜬 아침도, 다가올 저녁도 즐겁다. 만드는 과정부터 나누어먹는 즐거움까지 모두 놀이와 같았다. 어릴 때 그토록 좋아하던 소꿉놀이의 현실판이 아닌가. 게다가 실제로 맛볼 수 있는 맛있는 것들. 보통의 일상이 놀이가 된 순간이었다.




편한 것에 익숙해졌던 나는 이곳에서 점차 다시 느림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비 오는 날 버스를 놓쳐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으나 이제는 예전과 같이 가만히 앉아 불평하며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노선이니 두 정거장 더 걸으면 된다. 이때 운동하지 언제 하나 싶어서. 나중에 또 편리한 게 좋다고 하는 모순덩어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 삶의 모토는 "지금"이다. 지금의 나에게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의 내가 진실했으면 됐다.


오늘도 맛있는 저녁을 먹느라 빵빵 부른 배를 가라앉히려 메이트들과 함께 마을길을 걷는다. 배는 부르지만 돌아가서도 토르티야 피자를 작은 오븐에 한 번 더 구워 먹을 예정인 우리는 그저 하릴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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