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쌓아온 시간은 배신하지 않아
가끔 TV 예능을 보다가 '띵' 하고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봤던 <어쩌다 사장>이 그러했다. 배우 조인성과 차태현이 시골 마을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면서 손님들을 대접하고 일손을 돕기 위해 찾아온 동료들과 투닥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본방송은 오래전에 끝났는데 20분 내외로 편집된 클립이 유튜브 알고리즘에 떠 보곤 했다.
그중에서도 오래 머릿속을 맴도는 장면이 있었다. 조인성과 함께 작품을 했던 동료 서넛이 하루 일을 도와주러 와서, 일과를 마친 뒤 가볍게 한잔 하며 일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다들 친해서인지 꽤 진지하고 솔직한 말들이 오갔다.그때 누군가 조인성에게 물었다. "예능을 안 하던 당신이 왜 이 프로그램은 하게 됐냐"고. 그때 조인성의 대답이 인상깊었다.
배우로서의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인간 조인성의 모습이 기대에 못 미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배우 조인성이 큰 문제없이 살아왔다면 인간 조인성 자체도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스스로에 대해 조금씩 믿음을 갖게 된듯 보였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한 지인을 만났다. 나의 예전 직장 동료이자 프리랜서 번역가와 편집자로 활동 중인 그녀는 현재는 아동 소설 작가까지 다양한 일을 해내고 있다. 만나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우리가 좋아하는 주제들을 꽤 긴 시간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만남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나태함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일도, 살림도 부지런하지 못한 것 같아서 반성 중이라고. 사실 그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내가 본 그녀는 계획을 잘 세우고, 그 계획을 꾸준히 실행하며, 결과물 역시 늘 훌륭했다. MBTI가 P라고 하는데 오히려 완벽에 가까운 J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 말에 그녀는 사실 주변사람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는 상관없이 주변인들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듯 하다고. 그래서 이런저런 고민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다들 그렇게 말한다면 나라는 사람이 살아온 삶이 나쁘지 않았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든다고 했다. 노력할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만들어온 시간들도 꽤 의미있었구나 싶고.
배우 조인성과 그녀의 이야기가 자꾸 떠오르는 건 나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친하게 지내는 커리어 코치님은 만날 때마다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글을 쓰라고 늘 말씀하시는데 그때마다 ‘그르게요..’ 하면서 웃곤 한다.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는 능숙하지만 정작 날것의 나를 드러내는 건 늘 주저하게 된다. 내 철학이나 일에 대해 꺼내는 것이 조심스럽고, 늘 부족하다는 불안감도 크다. 업계의 훌륭한 분들이 전하는 인사이트나 새로운 케이스에 놀랄 때가 많아서인지 나의 경험은 늘 작고 비루하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연차가 쌓이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각자가 기대하는 모습을 나에게 적용시켰고 그동안의 경력은 전문가라는 과분한 이름을 얻게도 했다. 누군가는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사실 그 타이틀이 주는 책임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나에 대한 기대감을 실망시킬까봐 숨거나 움추러들기도 한다.
그러다 이 두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해본다. 거창하진 않지만 큰 탈 없이 이 일을 꾸준히 해왔다면, 내 손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계속 만들어왔다면, 그 자체로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나라는 사람에게 관대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김장하 선생님은 말하지 않았나.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고.”
나 역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화려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는 사람들이 멋진 건 사실이지만,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담백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크고 깊은 힘을 발휘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면서 내 스스로에겐 유독 혹독하신가요. 우리 조금은 관대해져봐요. 우리가 지나온 그 시간의 힘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