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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Issue Jan 05. 2021

무심한 아빠, 심심한 고양이

  한참 잠에 취해있던 깊은 밤, 우당탕탕하는 굉음이 잠을 깨웠다. 놀라 일어나서는 채 다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캄캄했던 집, 불을 하나씩 하나씩 켜면서 무슨 일인가 여기저기 살폈다. 거실도, 부엌도 별다른 건 없었다. 작은 방에 들어서야 무슨 일인가 알아챘다.

  옷장 위에 접어서 올려두었던 온수매트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된 전원 버튼과 온도조절 버튼이 있고, 물이 떨어지면 물을 채워 넣기도 하는 본체 부분은 두 동강이 나서는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깊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범인은 범행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지 않던가. 사건 현장(?)을 뒷수습하는 동안 막내 녀석이 문 앞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내 눈치를 살핀다. 막내의 땡그란 눈과 여전히 반은 감겨있는 내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막내는 슬금슬금 내 옆에 다가와서는 자기 머리를 내 다리 부비고, 골골송까진 부른다.


  이놈의 짜식, 조용한 한밤 중 자다 깨서 심심했구나. 

  심심해서 여기저기 놀거리를 찾다가는 의도치 않게 사고 한 번 쳤구나.

  혼낼 힘도 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드니 어째 막내가 애잔하기까지 했던 밤이다.




  막내는 에너지 하면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고양이다.

  처음엔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들에 비해 여기 뛰고 저리 뛰는 게 그저 어려서 그러겠거니 했다. 얼마 지나고는 막내가 어린것도 있겠지만 막내의 성격 자체가 호기심 많고, 활발한 것이 눈에 띄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막내 나이 때의 첫째, 둘째는 차분하고 조용한 도도한 고양이들이었다. 어린 시절 발랄함은 뗀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막내도 형들처럼 그러겠거니 했던 내 생각은 틀렸다. 


  막내는 똘망똘망 눈과 개구진 표정으로 오도도도 뛰어다니고, 여기저기 냥냥펀치를 날려보고, 집 안 구석구석을 요리조리 탐험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5살이 되어도 이런 막내의 모습이 내 눈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가끔은 막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자주 들었다.

  내가 같이 놀아줘야 하는데, 저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만 찾으면서, 때로는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놀아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쓰였다.




  사실, 첫째와 둘째가 막내와 놀아줄 순 없다. 5살 차이나 나는 막내의 에너지를 어떻게 그 녀석들이 따라간단 말인가. 막내의 그 활발함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 것 같다. 직무태만이었다.

  사실 막내의 걷는 것만 봐도 심심한 지를 알 수 있다. 지루한 막내는 거실, 부엌, 방, 옥탑까지 두리번두리번 걸어 다닌다. 괜스레 가만히 자거나 쉬고 있는 형들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애옹애옹 울어보기도 한다. 어쩔 땐 귀신이라도 본 듯 갑자기 눈이 땡그레져서는 우다다다 뛰어보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엉덩이가 무거운 난 얼른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놀아주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 죽일 놈의 귀차니즘. 막내가 심심해 보인다고 좀 놀아달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겨우 소파에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킬 때가 빈번하다. 그렇게 일으킨 몸으로 아주 조금 놀아주고는 다시 소파도 돌아오기도 일쑤다. 정말 빵점짜리 아빠다.


  아예 안 놀아주는 나쁜 아빠는 아니다. 신나게 놀아줄 때도 있다. 다만, 매번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한 번씩 막내가 숨을 씩씩 내쉴 때까지 놀아줄 때가 있다. 오뎅꼬치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있고, 쫓아다니고, 안고, 격하게 쓰다듬으면서 놀기도 한다. 

  그렇게 한바탕 격하게 놀고 지쳐 않아있는 막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하고, 꼬리로 바닥을 톡톡 치기도 한다. 그럴 때 막내는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인다. 또 그런 모습을 보면 나 역시도 만족스럽다. 


  내일도 놀아줘야지, 자주 놀아줘야지 생각한다. 문제는 다음 날이면 몸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한밤중 그 큰 온수매트를 떨어뜨리고는 놀라 있는 막내의 모습을 보는데, 깜깜한 밤 혼자 심심함을 달래 보려 이리저리 기웃거렸을 막내의 모습도 같이 보인다. 무심했던 아빠는 자다 깨서는 미안하다. 어쩜 이리 미안한 것 투성인지.


  우선은 다시 한번 다짐부터 해본다.

  우리 막내 앞으로는 지루함에 뒤척이다 잠든 날보다 놀다 지쳐 잠든 날이 많게 해 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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