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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싶을 때

by 나쵸킬러

때때로 마음이 콱 막혀서 미치고 싶을 때가 있다. 앞날은 막막하고, 오늘 하루 치의 삶마저 버거워 그냥 모든 것이 끝나길 바랄 때가 있다. 생이 주는 무게에 지쳐있던 주인공들은, 자살에 쏟던 노력을 뒤로하고 상황을 바꾸기로 한다. 자살 상담소에서 만난 두 남녀가 계약 결혼을 통해 현실을 탈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별을 통해 죽어있는 눈빛과 까칠함만 남은 ‘차히트’과 달리, ‘시벨’에겐 야생화 같은 생기가 어려있다. 시벨은 무슨 확신인지 처음 보는 남성인 차히트에게 터키인이라는 이유로 계약 결혼을 요구한다. 얼토당토않은 억지처럼 보이던 것은 어느새 이들을 식장으로 이끈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에서 우울감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소를 바꾸는 것’, ‘만나는 사람들을 바꾸는 것‘, ’시간 패턴을 바꾸는 것’이라 했다. 시벨은 고지식한 부모님에게 벗어나고 싶어 자해 소동 이후 차히트와 결혼하자고 조른다. 부모님이 타협할 만한 대상인 터키인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성관계나 로맨틱함이 없이 룸메이트부터 시작한 둘은 새롭게 펼쳐진 환경 앞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차히트는 시벨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클럽에서 다른 남자와 나간 후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여자를 기다리며 홀로 히스테리를 부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하면서도 시벨을 떠올린다. 계약 결혼과 이혼이라는 계획이 완고한 시벨과 달리 어쩌면 시벨의 의지에 휩쓸려온, 혹은 휩쓸리는 듯이 이끌린 차히트는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남몰래 피워낸 감정은 자각하기 시작한 후 걷잡을 수 없어진다. 한편 차히트는 자신의 감성을 사랑이라고 정의할 때, 시벨은 남편의 애인이 둘이 서로 무슨 관계냐는 물음에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라고 말한다. 피하고 싶은 현실에 또 자해를 한다.


결국 차히트에게 시벨은 그의 삶을 살게 하는 이유로 자기 매김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각자의 길로 떠난다. 이들의 결합은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이고 나름의 노력이 아닐까. 이들의 결혼이 사랑이 아닌 생존에 대한 것일지라도 진심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또한 그렇기에 둘의 관계를 단지 이성 간의 애정관계라고 치부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한 초반부와 후반부의 감상이 매우 다르다. 초반부에서는 파스빈더의 영화처럼 우울한 사람들의 동맹 같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본 후에는 이 영화는 그냥 불행 포르노라고 판단됐다. 매력적이었던 캐릭터와 흥미로운 둘의 만남이었는데 안 그래도 제목처럼 미쳐있는 캐릭터들을 더 충돌시키더니 자기 파괴적인 무드로 끝까지 끌고 갔다. 그곳엔 역시나 피떡이 된 얼굴과 강간, 폭력은 빠짐없이 존재했다. 영화의 서사는 미치고 싶은 감정을 딛고 새로운 상황을 통해 날아오르는 듯하다가, 결국 불행 포르노로 전락하며 똥폼과 유사한 존재로 고꾸라졌다. 염세적이고 잔인한 영화다.


카메라 속에서 인물들은 섹스와 피, 죽음에 허우적거린다. 영화 정도는 희망적으로 남겨도 되지 않는가에 대한 희망을 짓밟는다. 나는 염세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독일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불편함과 함께 이상한 이물감이 들었고 정보를 찾아본 뒤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미치고 싶을 때>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 곰상을 받으며, 독일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이라는 큰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어쩐지 그들의 입맛에 꼭 맞는 영화다. 어째서 유럽의 권위적인 상을 받는 예술 영화들은 늘 홍상수, 김기덕 영화 마냥 강간과 폭력이 선호되는 걸까. 그것이 곧 예술이라는 듯 말이다.


영화는 독일 이민자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감독인 파티 아킨이 31살의 젊은 터키계 독일 감독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슬람 율법 아래에서 가부장제에 휘말린 여성의 답답한 심정을 잘 옮겨냈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터키 전통 악단의 연주는 영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이 음악들은 인물의 심정과 정서를 드러내는 한편 의도적인 흐름 끊기를 통해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멀찍하게 유지시켰다. 가장 좋았던 장면 역시 시벨을 위로하기 위해 남자의 친구가 불러준 잔잔한 터키 노래였다. 영화는 독일에 섞인 이주민의 문화에 대한 충돌과 허망함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노력은 이민자에 대한 목소리가 독일 영화계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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