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는 태어났을 때 이미 성인의 지성을 지녔지만,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세번째 생일을 맞던 날 스스로 성장을 멈추기로 한다. 오스카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양철북을 두드리며 푼다. 누가 양철북을 뺏으려고 하면, 그는 소리를 질러 주위의 유리들을 깨부순다. 어린 아이로 남았기에 어떠한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됐던 오스카에게 성과 사랑은 너무도 큰 결핍이자 과제이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불륜관계, 나치 당원인 아버지의 품 속에서 성장하며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다.
오스카는 어린 아이의 몸을 가면으로 내세우며 성숙한 어른의 정신을 감췄다. 때문에 오스카는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마음껏 비판할 수 있음과 동시에 비도덕적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정상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자유로히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어린 아이의 시선 속에서 어른들에겐 눈에 잘 안 띄는 것들을 오스카는 더욱 가까이에서 포착할 수 있다.
영화는 20세기 전반 독일의 폭력에 물든 역사와, 어른들의 성적인 추태가 고스란히 드러낸다. 오스카는 화목하게 카드 놀이를 하고 있는 어른들의 테이블 밑에서 행해지는 얀과 어머니의 밀회를 발견한다. 오스카는 어른 세계에 혐오감과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성장을 멈추고 거인들 사이에서 소인으로 남기로 작정한다. 마음은 어린아이 지성은 어른인 오스카의 독특한 시선으로 독일 시민들의 속물적인 삶, 전쟁과 허무한 죽음에 대한 환멸감과 조롱을 드러낸다.
영화엔 세계를 향한 상징과 은유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양철북, 뱀장어, 치마 속, 베토벤 초상 등이 그러하다. 오스카는 양철북을 통해 일그러진 어른들의 세계와 현실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도구로 사용한다. 북은 독인과 폴란드의 국기 색과 같아, 오스카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암시한다. 양철북의 소리는 양철에서 만들어지는 ‘괴성’이다. 나치의 군국주의의 행진과 폭력성이 반영된다. 나치가 몰락하면서 공격성을 드러내는 양철북과 유리를 깨뜨리는 목소리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또 죽음마저 지독하리만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인상 깊던 죽음은 서커스단에서 만난 왜소증의 여자친구이다. 황급히 대피를 떠나야하는 와중에 그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이유로 폭탄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파리 목숨처럼 쉽게 죽어나가는 생명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로 해설되는 전쟁의 잔혹함은 개개인에게 얼마나 쉽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는지 인식시킨다.
한편 패전 뒤 아버지는 나치를 색출하는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카가 건낸 자신이 버린 나치 배지를 삼키려다가 총살당한다. 결국 그가 신봉했던 나치즘은 자신을 파멸시킨 것이다. 이는 아버지 세대의 어두운 역사적 유산에 대한 응징이라고 볼 수 있다. 긴 시간동안 성장을 멈췄던 독일은 종전을 맞이하며 다시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오스카는 다시 자라나기를 다짐하며, 아버지의 관 위로 그간 집착해오던 양철북을 내던져버린다. 어머니와 얀 그리고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나치즘의 과거가 종전과 더불어 청산되었으며, 그들이 상징하고 있던 부조리가 사라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스카의 멈춰버린 성장은, 죽음과도 같던 시기를 보낸 독일의 잃어버린 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오스카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과거 독일을 죽이고 아버지가 남긴 정부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동생을 지고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이는 독일 전후 세대의 자화상이자 새로운 독일 영화의 자기선언이다. 첫 시퀀스와 매치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할머니가 감자를 굽는 그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은 독일 역사의 순환과 성장을 제시한다.
영화는 나치 시절의 독일을 배경으로 전체주의적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배경이되는 단치히는 오랫동안 슬라브 원주민, 독일인, 폴란드인, 유태인 등 여러 민족이 공존해 왔던 도시이다. 따라서 민족간의 갈등과 정체성 문제가 항상 쟁점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카의 아버지는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동시에 제시되었다. 원작 소설에서도 누가 친아버지인지 모를정도로, 오스카의 정체성 역시 모호하다. 어머니를 짝사랑한 장남감 가게 주인은 유대인이기도 했다. 인물들은 독일의 전형적인 소시민의 속성을 드러낸다. 오스카는 냉정할 정도로 이기적이며 불평이 많다. 당시의 독일을 대표하는 단치히와 소시민들의 행보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오스카가 괴성을 질러 유리를 깨면서 자신의 의사를 세상에 전달하고, 양철북을 두드려 나치 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회장으로 둔갑시키며 회화화했던 것처럼, 슐렌도르프에게 ‘양철북’은 독일의 역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윗세대에 대한 거침없는 저항이자 도전이었다. 원작자 그라스는 “독일 역사는 늘 자신 앞에서 가로 놓인 집단책임의식이었으며, 글쓰기는 과거를 현재 속에 되살리는 일, 상처를 드러나 보이게 하는 일, 너무 쉽게 아물게 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독일을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점검해야만 한다. 그동안 경제는 눈 부시게 발전했지만 사회적인 의식은 여전히 미성숙하다. 기형적인 성장은 승자과 패자가 있는 경쟁사회를 만들었고, 자본주의 맹신을 통한 편협한 틀에서 사고하게 만들었다. 국가는 부강해졌지만 개인은 불행하여, 삶의 도피처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러한 기형성의 반영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부끄러운 상처를 마주하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소만섭. 양철북: 퇴행과 저항으로 소설과 영화 읽기. 인문과학연구. 2004. 12, 299-321
장은수. 폴거 슐뢴도르프의 영화 <양철북>과 아이의 시선. 독일학연구 5권. 2000
안시환. 부끄러운 역사 앞에 침묵을 거부하다. 씨네21. 2007 김래현. 역사로서의 <양철북>. 독일어문학 24집. 한국독일언어문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