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이야'라는 표현의 말은 영어로는 SoSo와 동일한 의미이다. '그저 그렇다'혹은 '그럭저럭' 등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보통'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음.' 이란 명사, '일반적으로. 또는 흔히.'라는 부사의 뜻을 가진다.
보통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속된 말로 '깔고 간다'라고 표현하는 최저치의 기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따라가기 버거운 기준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일만 하며 재미있게 살 순 없을까?> 책에서는 '보통'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보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서 결국 아무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통'을 지키기 위해서 참고 참으며 계속 일하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보통을 신경 쓰며 무리하기보다 내가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면 됩니다. 그러니 과감하게 보통이라는 기준을 버리고 살아보면 어떨까요?
보통이라는 기준에 매달려 보통에 못 미치는 내 결점만 신경 쓰는 것보다 훨씬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김이나 작가의 책 <보통의 언어들> 그리고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혹은 '누구나 있을법한'의 의미로 사용된다.
나의 10대 시절은 후자의 의미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시절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미국에서 영어로 나의 10대를 표현하기 위해 soso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과연 그 뜻이 통할까? 우리말은 참 찰떡같이 달라붙는다.
보통의 10대
보통의 10대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150여 센티미터의 키에 약간은 토실한 몸과 얼굴, 귀 밑까지 내려온 시커먼 반곱슬 단발머리 그리고 아무런 의지도 없다는 듯한 흐리멍덩한 눈빛. 그런 전형적인 보통의 10대 모습이었던 나의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불행히도 여중, 여고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나는 이성친구가 아닌 동성친구들과 추억이 많다.
나는 내 추억을 쏟아낼 터이니 다들 각자의 10대 추억으로 빠져들어가보길 바란다.
상을 받았지만 찜찜했던 기억
나의 10대 시절에는 학교에서 주는 상이 참 많았다. 성적우수상, 개근상, 백일장 등 상을 하나 받으면 어깨가 으쓱해지던 누구나 하나쯤 상을 받던 그 시절.
중학교 3학년. 당시 나는 장편 소설을 종종 읽었다. 이문열의 삼국지,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등을 읽고 장편소설에 빠져 한명회 같은 책도 읽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나이에 그 글을 얼마나 이해하고 읽었는가 싶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었다기보다는 '응당 똑똑한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니까'라는 이유로 어른들의 소설만 골라 읽었다.
그날도 학교 도서관에서 장편 소설 중 한 권을 빌려 읽고 있었다. 그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내가 읽는 책을 보고 우리 엄마에게 연락을 하셨다. 이유는 우리 반 1등이 공부를 안 하고 소설책을 읽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 일을 계기로 중3에게 소설을 읽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인식이 박혀서인지 혹은 잔뜩 들은 겉멋을 이참에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던 건지. 여하튼 그날 이후로 나는 책과 멀어졌다.
그러고는 독후감으로 학교장 상을 받았다. 매우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다지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의 제안으로 독후감을 제출했고 몇 번의 선생님 첨삭을 받은 후 상을 받게 되었다. 소설책 읽는 시간이 아깝다며 혼을 내던 선생님이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제안하니 아이러니했다.
단짝 친구
우리의 10대에는 친구가 가장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단짝 친구는 서로의 영혼까지 아는 유일한 존재이다. 단 한 명의 내 마음을 나눌 친구만 있어도 충분하던 그 시절. 나도 역시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한 단짝이 있다.
고등학교는 여중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여고로 입학한다. 1학년에 단짝 친구 A를 만나 3학년까지 붙어 다녔고, 주변 친구들은 우리 사이에 끼어들기 어려울 정도로 끈끈해 보인다는 질투 어린 말을 자주 했다.
나와 A는 각자의 집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독서실에 1달 비용을 지불하고 그곳에서 매일 만나 공부도 하고 때론 일탈을 하기도 했다. 나의 학교에는 할아버지 영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독서실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셨다. 우리는 혼자 사는 선생님의 적적함을 풀어드린다는 핑계로 선생님 집에 종종 방문하여 맛있는 것을 받아먹거나, 가끔 선생님 차로 드라이브를 떠나 교외 라이브 카페에서 맛있는 스파게티를 얻어먹기도 했다. 선생님의 외로움을 우리의 시간과 맞바꿔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는데 이용했다.
친한 만큼 싸우기도 자주 했다. 절교 선언을 두어 번은 한 것 같다. 둘이 절교하기로 한 어느 날 나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미용실에 가서 긴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 이후로 다시 화해를 하긴 했지만, 나의 머리는 고3 졸업 때까지 단발머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좋아하던 선생님
여고에서는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성을 향한 호기심이 향할 곳이 없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랄까. 우리 학교도 예외 없이 남자 선생님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나는 체육선생님을 좋아했고, 내 단짝 A는 물리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애는 늘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싱글이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우리는 용돈을 모아 홍대 앞 예쁜 소품 가게에 들러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을 잔뜩 사서 돌아오거나, 선생님 자리에 꽃을 바꿔드린다며 양재 꽃시장에 가서 분홍색 수국을 한 다발 사 왔다. 누가 볼세라 새벽같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 책상에 선물을 올려두고 꽃을 꽂아두던 열정 많은 소녀였다.
나의 체육선생님의 별명은 멸치였다. 고등학교 1학년 첫 체육 수업에서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일었다. 첫 수업 이후 멸치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커밍아웃 한 아이들은 각 반에 최소 1명. 많게는 2~3명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인기는 떨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경쟁자가 줄어들어 더 좋았다. 최종까지 남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비결은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것뿐. 그 선생님을 열렬히 좋아했고 그의 발자취만 따라다녔다. 15년 나이차는 별거 아니라며 결혼하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빠져있던 나였음에도 1년쯤 지나고 사랑의 눈꺼풀은 어느새 사라지고 멸치 선생님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뭐든 후회 없이 해봐야 뒤탈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알게 된 소식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그 선생님은 나보다 3년 먼저 자신을 좋아했던 어느 선배 언니와 결혼에 골인했다. 둘은 12살 차이다.
수학여행 그곳에서의 첫 알코올
10대 시절 또래 아이들과 여행을 떠나는 것은 수학여행이 유일하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대부분은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부모님과 함께가 아닌 친구들과의 여행은 버스를 타면서부터, 아니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는 순간부터 설렘의 연속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는 경주였다. 경주는 지금도 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은 뜻깊은 장소임에 틀림없지만, 10대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겪어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장소는 사실 안중에 없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중요하다.
수학여행이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또 다른 이유는 멸치 선생님도 함께였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을 맡고 계시지 않았음에도 같이 오게 된 것은 나 때문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용기가 생긴 게 아닐까.
위스키가 들어간 초콜릿을 누군가 가져왔고, 하나를 집어 물었다. 처음 내 몸에 들어와 반응을 하던 알코올인지라 몇 방울에도 취기가 확 올라왔다. 취기를 무기 삼아 난동 아닌 난동을 부렸다. "멸치 선생님 데려와. 멸치 선생님 어디 계셔." 라며 바닥에 누워 발버둥을 쳤고 아이들은 선생님을 모셔왔다. 아이들은 옆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며 즐거워했다. 선생님의 반응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행복해하던 시절. 그때의 그 기억은 여전히 나를 18살 고등학생으로 변하게 한다.
특별했던 경험, 잊지 못할 추억
10대, 공부만 하면 되던 시절. 그럼에도 누구나 일탈을 꿈꾸거나 나름의 추억은 가지고 있다. 나의 잊지 못할 추억은 출가 생활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합법적으로 출가 생활을 오래 누렸다. 덕분에 부모님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지역은 시골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지역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뒷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밑밥이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우열반'을 만들어 아이들을 갈랐다. 나와 내 단짝 A는 '우'반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공부에 열의가 비교적 있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2년의 시간을 보냈다. 학교는 우리 학년 아이들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았는지, 급기야 체육관 옥상에 '생활관'이라는 곳을 만들어 우반 아이들을 위한 숙박장소를 제공했다. 친구들과 한 곳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던 귀한 시간. 사감 선생님이 자리를 잠시 비우면 아이들은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었다.
하루는 생활관에서 문을 열고 나오니 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18살의 여고생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눈밭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했다. 어느 날은 우리 중 누군가가 야한 비디오를 보자며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빌려왔다. 영화 '연인'이었다. 19금 장면을 여과 없이 보았던 그 날은 잊히지 않는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화면만 쳐다보던 그때가 그 장면이 지금도 그려진다.
우리에겐 모두 보통의 10대 시절이 있다.
무미건조한 보통의 10대를 보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나도 즐거웠던 시간을 보냈다. 공부만 하면 되던 지루한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친구와 함께한 추억 덕에 가능했다. 인생에서 그때만큼 친구가 소중한 적도 없었다. 10대의 이야기에 가족은 없고 친구만 있다.
보통의 10대, 그 시절은 내 인생의 자양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