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부부와 호흡하다

청도운림고택에서의 시간들

by 은후


청도 운림 고택을 다녀오다



자차로 이동하면 세 시간 남짓이 소요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일곱 시간이상도 지체할 수 있는 그곳. 출발하기 전날까지 과연 갈 수 있을까 심히 마음을 졸였다. 평소엔 잔잔하던 천변이 그즈음 왜 이다지도 출렁거렸는지, 나는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안도했다. 청도를 가면서 가장 기대만발했던 일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서울에서 은퇴 후 귀향한 경로회장은 우선 내시 家를 안내했다. 마을에 문화적 자산이 많다고 이 길을 어릴 때 걸어 다녔다는 오늘의 안내를 맡은 수필가이다.



동네에서는 고자 집, 내시 집이라고 부른다 한다.

임진왜란 전부터 400여 년간 내시가계가 이어온 집으로 18∼19세기에 조선시대의 궁중 내시로 봉직한 김일준이 통정대부 정 3품의 관직까지 지내다 만년에 낙향하여 지은 것이다.

이세준 어른이 와서 18대 약 4백 년을 이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개 고자( 옛날 아기가 똥을 싸면 강아지가 똥을 핥아먹다가 아기의 고환까지 깨물어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아기는 고통에 차서 얼마나 울부짖었을까)인 아기 고자만 입양하였다. 그러나 생가의 성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씨를 퍼뜨리지 못해도 원뿌리는 갖고 있으란 깊은 의미인가 싶었다.



한옥에서는 대부분이 방문은 남향으로 두는 데 비해 이곳은 방문을 임금이 있는 쪽인 북향으로 낸 것이 특징이다. 남향이나 남동향 또는 남서향이 아닌 방향으로 집을 지은 이유는 임금을 사모해서 궁궐 쪽을 향한 충절의 표상이라고 한다.


얼마나 부자였는지 일 년에 소작료로 거두어들인 곡식이 만석이나 되었고 한다. 청도군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는데 족히 450호가 살았다고. 머슴인 종만 해도 그 수가 엄청났다고 하며, 생업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소소한 성씨들이 몰려들어 살았다고 한다. 고택에서 놀랐던 점이 안채인 6칸 보다 규모가 컸던 맞은편에 자리한 큰 고방채(4칸), 소고방채(4칸)이었다.



그때 마을 할머니들이 손자를 데려왔는데 여섯 살까지만 들어올 수가 있었고 일곱 살부터는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아마도 남녀 칠 세 부동석과 관련이 깊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곳 고택 구조만 보더라도 대문에서 사랑 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통과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배치하여 일반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마을 내시는 모두 부인이 있었다. 자료 수집 결과 15대부터 상세한 상황과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이 가의 후손은 생존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기억을 더듬어서 기록이 취약하지만 궁궐에서 벼슬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컸다. 돌아가신 후에 지관을 데려왔다.


그가 임종했을 당시 15미터가량 만장을 맨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다. 중간중간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 그들을 먹였다고 한다. 혼자만의 부를 누린 놀부가 아닌 주린 고픔을 외면하지 않고 누구든 배불리 먹였던 큰 어른을 상상해 본다.


17대 어른은 궁궐에서 벼슬한 후 낙향하였는데 갓 임명된 청도군수가 이곳에 방문해 인사를 했다고. 이 지역에서 100리 이내의 선비들은 이 집을 거쳐 갔으며 숙식했다. 그러던 중 한 선비가 와서 죽었다. 연고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인근 산을 찾아 눈이 덮지 않은 유일한 곳에 그를 묻었다. 그 후손들이 5.16 혁명 이후 자가용을 타고 내려왔다. 풍수지리가 매우 좋아 이 마을 최고 명당이었다. 후손들이 일대를 사들어 묘지공원을 조성했다.


상량문을 보면 1921년에 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8대인 김진우 어른이 이 댁의 마지막 내시이자 고자로서 마지막을 지켰다.



농지개혁을 하면서 소작농들이 다 신고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땅을 빼앗기자 갖고 있던 땅을 팔아 사과 농사를 시작하였다. 마을에 금융협동조합을 세우고 처음으로 금융경제를 설치한다. 우체국을 설립하여 지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안주인은 서울댁으로 서울에서 내려왔다. 남편인 김진우 어른의 환갑을 맞이하여 금천 면내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 음식을 대접한다. 고자의 부인인 서울댁을 그때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내시가 부인이 있었다는 것도 눈이 커지는데 그를 실제로 보았으니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입양한 조카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김진우 18대 어른은 내시 중에서 손자를 품에 안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하니, 그 감동이 어땠을까 상상만 해본다.


운림고택은 한강 이남에 내시 家가 보관되기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뒷산에 올라가서 전경을 바라보면 마을 중앙에 위치한다. 한양에서 지관이 내려와서 내시 가를 이루고 있다. 이는 엄청난 가치로서 마을이 관리하고 있다. 현재 청도군과 경상북도에서 관리 비용을 보조하고 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보이는 마당이 있다. 그 마당 가운데 오래된 듯한 나무를 보았다. 이끼가 낀 죽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풀이라니. 풀도 먹거리로 보시한 내시家의 나무를 껴안고 싶었던 걸까.


그 가까운 곳에 내가 이곳을 오고 싶었던 단 하나의 표적이 있다.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손으로 사랑을 그러모은 하트 같은 문구멍이라니. 오늘날 아파트 현관문의 외시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 형태가 너무나 낭만적이다.

이 구멍을 통해 내시 부인의 여종은 사랑채의 신발을 보고 손님에게 음식 대접을 준비했다고 한다.


설마, 음식 대접할 사람의 수만 헤아렸을까. 오가며 남녀가 서로의 모습을 슬쩍 보거나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지는 않았을까. 내시 부인은 이 하트를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갇힌 공간이지만 이 하트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숨구멍을 개방할 수 있었을 것이며 궁궐의 승은을 입지 못한 궁녀보다는 자유롭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토록 베푸는 후덕한 성정의 내시였기에 갓 부임한 지방관리가 첫인사를 하러 찾아오지 않았을까. 99를 가진 이가 1까지 채우려고 편리를 위해 제공한 에이포 용지 한 묶음, 다수를 위해 제공한 믹스커피 봉지를 한 움큼 가져가곤 했던 건물주를 알고 있다. 저렇게 지독해야 조물주보다 높다는 그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씁쓸한 적이 있었다.


운림고택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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