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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Nov 20. 2023

가을 끝에서 잡은 유리구슬과 지구

가을나무에 11월 잎새 열 장이 매달려 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 혹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독서하기에는 자연이 가만히 두질 않는다. 그리움과 아쉬움이란 묘한 감정이 살갗으로 긁는다. 감정이 가렵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 주는 수분을 잔뜩 머금어야만 할 것만 같다.

가을은 묻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데 묻냐는 듯이 온다고 한다. 깊고 넓어 무엇이든 받아줄 것 같은 중년 여인으로 온다고 한다. 와서는 소매 걷어붙이고 봄과 여름 우레가 울렁거리던 들녘 천연섬유에 염색한다고 한다.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는 성인인가, 소녀인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십 대 시절부터 꾸준히 질문했던 숙제이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심오하다 무섭게 쓴다는 눈초리를 한 몸에 받았던 허무주의자가 바로 나이다.

하교하는 길바닥에서 탕진하고 남은 물기에 젖은 채 뒹굴며 옷을 여미던 최루탄 찌꺼기를 차마 볼 수 없어 시선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자화상 같아서 더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상황이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능력은 아직 미흡하기만 하여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질 않는다. 구석에서 웅크린 몸으로 고개 숙인 머리칼로 활자 중독이란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 수업 마치면 만화방 아르바이트로 얼마 되지 않지만 돌파구로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시도했다. 99.7 Mhz 별이 빛나는 밤에 두 시간은 영혼을 달래주는 천상의 소리요, 일요일 저녁 10시 KBS 명화극장이 없었다면 지금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동생네와 금관숲을 다녀온 적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콧바람을 쐰 적이 있기나 했는지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7년 만의 외출과 버금가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을 담은 망막이 질책하였다. `넌 어떻게 산 거니? 참 재미없게도 살았구나` 옆자리의 젊은 커플이 만든 불 멍을 보면서 울컥 시 한 편을 썼다. 조카는 날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저도 시를 쓰겠다고 핸드폰에 뭔가를 입력한다. 산책할 겸 걷다가 흐르는 물이 잠시 모여드는 곳에서 물놀이하는 천진한 웃음소리를 음악처럼 음미한다. 물에 일렁거리는 결 따라 물 멍하면서 시 한 편을 지었다. 일어서서 몇 걸음 걷다 뒤따르는 것이 아닌 앞서는 그림자로 갑자기 거인이 되었다. 사진을 찍고 옛 생각이 나서 또 시 한 편을 지었다. 그날, 덜 익은 떫은 감정이 그득한 시 세 편이 귀가했다.


유명 수필가 선생님의 `유리구슬과 지구` 작품을 읽었다. 어릴 적 둥글다는 지구를 오감으로 거부했다. 오히려 직사각형만 같았다. 그 끝을 가면 무언가 있을 것 같아 호기심이 충만했다. 바로 어렸다는 증거이다. 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작은 가슴으로 어머니의 큰 사람을 감각할 수 없듯, 큰 사람은 한 눈으로 볼 수 없다. 한눈에 보려면 감각을, 큰 사람은 큰마음을, 지구가 일으키는 바람은 지혜로 결국은 나를 키워야 한다. 나의 영혼을 키워야 한다. 이 문구가 자꾸 아나콘다처럼 속을 옥죄고 풀어주지 않는다.


유리구슬은 투명하여 망막에 그대로 투영된다. 숨길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의 표면적으로 투영되는 면적이 작다는 것을 오감이 감각한다. 알되 아는 것이 아니요, 모르되 모르는 것이 아닌 애매한 나다. 뭐든 아직 어설프다. 깊이가 없이 겉핥기이다. 이 작품을 썼던 수필가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이런 작품을 지을 수 있을까. 영혼의 눈, 지혜의 눈, 사유가 깊은 우물 같은 눈을 차분하게 키워 보자 차근차근 다지면서.


그야말로 붉은 심장을 거리낌 없이 꺼내 보이는 순수한 가을이 사방에서 발길을 잡아챈다. 바삭거리는 낙엽을 밟는 스카프가 제 역할을 하려고 가을을 휘감는 아름다운 11월, 사색과 독서로 계절을 마음껏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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