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후 Aug 04. 2024

언어, 깊은 사유를 만나다

통증으로 변화를 추구할 언어

언어, 통증을 발판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다



무엇이든 언어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었다.
그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말한다.

_버지니아 울프, 《존재의 순간들》 부분



통증 언어학, 제목부터 남다른 사유가 배어나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을 만나기 위해 빗속의 서울 종로 3가를 익숙하게 걸어갔는지도 모른다.


욕망 덩어리인 파롤의 속성에 얽매이다 칠, 팔월 한증막 더위를 만나 귀차니즘이 발동하여 파롤 또한 줄어들었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선생님 몇 분이 '습사무소'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목차를 먼저 훑어보는 습관이 있어 찾았으나, 목차에는 없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습사무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언어는 가능의 빛이라기보다는 불가능의 어둠이다.

'기표에 미끄러지는 기의'라는 라캉의 설명이 내 언어 인식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언어는 진실과 본질의 언저리에서 변죽만 울리고 끝날 때가 많다._24쪽


표준어는 특정 시점에서 정해진 문법의 척도로 구체성이 없는 인공어에 가깝다. _37


<아침 잡샀니껴>가 나는 '습사무소'보다 더 오래 생각이 머물렀다. 충청도가 놓아주지 않는 충청도가 선택한 인물인 나는, 한때 L로 이니셜을 시작하는 대기업 인사과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마주 선 똑같은 빌딩과 제주도 방언 버금가는 부산 바다 사나이들의 사투리가 아찔하다.


공교롭게도 내 상사는 부산 바다 사나이였으며, 바로 윗 사수는 미안하지만 상당히 혀가 짧은 부산 섬 사나이로 당최 적응되지 않는 사투리의 홍수 속에 나는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게 기쁘지 않았다. 일과 관계가 힘든 게 아니라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서 직장생활이 힘들 것이라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드라마나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6개월이 지났으면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될 만도 할 터인데, 그때까지 나는 지시사항을 되묻는 모자란 사람으로 자괴감이 복받쳐 출근할 때마다 사표를 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결국 칠 개월이 되기 전에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서 이 좋은 직장인 인사과에서 사표를 내는 직원은 처음 본다."는 과장님과 본부장님의 말을 뒷전으로 그 건물에서 사투리가 날 아웃시켰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나는 부산 사투리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런데, 작가가 되고 나서 부산에 사는 사람들과 다시 소통하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사투리가 적게 묻어서인지 소통하는데 전혀 장벽이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 부산 사투리에 트라우마 대신 다가가게 되었으니.

_표제작인 통증 언어학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_비트겐슈타인



석담과 고죽의 대립하는 두 예술관의 변증법적 통일을 통해 작가는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신에게서 균열을 발견할 때 밀려드는 회한과 허적이, 그리고 자기를 지움으로써 완성의 자기부정의 비극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날 뱉은 그 허접한 말들을 끌어모아 한꺼번에 없애고 싶다며 스스로 까불지 말자고 다짐한다.


현상 너머에는 불가지하 심연의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허명을 좇아 까불고 다니지 않는가.


겸손한 글을 통해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엿볼 수 있었다. '언어의 기본을 위반하는' 《통증 언어학》의 제목의 이유를 이 표제작을 통해 조금은 작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_조지 오웰


              

  책을 다 읽은 후 떠오르는 몇 작품을 열거하자면,


<순박한 언어가 목마르다> TV를 거실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보통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몰아서 주말에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하는 편이다. 한동안 '되게', '개_이뻐' 마치 형용사나 부사처럼 사용하는 두 글자에

온통 외래어인 아파트네이밍에 대해 PS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 공감이 컸다.


몰랐던 "언어중력이론"을 알게 되어 이것이 '초중심 언어'로 발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나 또한 여러 힘 있는 알고리즘의 조야함에 저항하는 언어의 절실함을 느껴본다.

말의 관습적 사용이 생각과 관점을 고착화할 수 있다.

                                                                  _77쪽



<할머니의 말> '꼴 베고 소 먹이는 일은 내 안으로 스며드는 언어의 통로를 좁게 만들었'다는 작가의 글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를 나는 거의 꺼내지 않게 된 데에는 사람들이 소설 쓰지 말라고, 상상력이 풍부한 거 아니냐고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깡촌에 어릴 적 살았기에 동년배와 한참 떨어진 전원생활을 한 적이 있어, 영화관은커녕 책조차 구경하기 힘든 곳에 살았다. 만약 부모님이 청주로 이사를 감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 문화의 변방에서 살았을지 까마득하다.


작가는 이를 두고 '원초적 한계'라고 겸양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를 깨달았기에 남보다 더 노력하고 남보다 한 자라도 더 들여다봤을 작가가 그려지지 때문이다. 왜냐하면 문화의 변방에서 나와 문화에 쇼크 받고 밤을 읽었기에 나는 지금까지 눈에 실핏줄을 달고 살뿐만 아니라 눈의 건강이 좋지 않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뭘 알지 못해도 뭘 깨닫지 못해도 그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좋았고 지금도 좋다.


<순백의 언어> 언제인지는 모르나 시도하고자 마음만 먹은 2인칭 화자의 시점인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순백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이런 할아버지를 만난 손녀는 십 년 만에 귀하게 태어났고 앉은자리가 꽃자리라고 말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순백의 언어를 듣고 자랄 아기가 부럽기 그지없고 어떻게 자라날지 기대가 크다.


자랑의 서식지는 언어이다.


                                                                  _111쪽


<고래를 춤추게 하는 칭찬은 싫다> 어떤 사람은 칭찬에 UP 되고 어떤 사람은 정당한 비판에 UP 되는 사람이 있는데, 작가는 후자에 속한다. 나는 물론 칭찬에 춤을 춘다, 그러나 알맹이 없는 뭉툭거린 칭찬은 달갑지 않다. 비판은 당장은 기분이 나쁘나 곱씹어보면 내 인생에 더 도약을 준 것 같다. '고래가 춤을 추는 것은 조련사의 칭찬이 아니라 먹잇감 때문'이라는 글귀가 수긍하게 만들었다.




<내 책과의 이별> 경매에 참여할 정도로 책에 대한 남다른 소신을 갖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10대 이후로 요즘처럼 양질의 독서를 한 적은 없었다. 밤에 눈에 불을 켜고 잠을 반납한 채 읽은 것은 연애 소설뿐이다. PS는 늘 새 책을 샀고, 나는 몰래가 아닌 당당하게 가져와서 읽고 반납하거나 반납하지 않은 책도둑이었다. 청주는 반값책값이라는 귀한 제도를 시행하여 나는 알차게 매달 신간을 볼 수 있고, 도서관에서 신간 코너를 주로 이용하기에 책을 거의 사지 않으므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책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욕망과 집착이라 폄하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런 집착과 욕망은 더 부려도 된다고.



<그곳은 있다> 말만 들어도 위안과 위로가 되고도 남는다. '40년 전에 머물렀던 그곳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한 것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그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살아 있는 한 그곳은 존재'한다는 글에서, 두 번이나 고향을 잃은 충격에 최근 몸살을 앓는 나는 잠시 머물렀다. 그렇다. 내 고향은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내 기억 속에 살아있으므로.



마지막 작품을 <기후변화와 그 대응>으로 끝맺음해 더 반가웠다.



파롤과 랑그로 시작하는 《통증 언어학》은 읽어 내려가면서 더 '초연결'되는 기쁨에 마지막 피니쉬 라인까지 지치지 않고 완주를 쉽게 할 수 있었다. 학자로 한 문예지의 발행인으로 수필가로서의 고민과 사유를 풀어내어 언어의 깊이와 무게를 느껴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