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가 받아낸 상실의 기억
속내를 오롯이 말로 표현하기엔 섬세가 무디고 복잡한 경우가 많다. 상실의 포탄을 직격탄으로 맞은 마음은 말로는 다 담아내기 어렵다.
입술을 열고 꺼내는 순간, 그 날것의 질감이 훼손된 낱말로 재단되며 원본의 깊이를 잃고 만다.
데미안 허스트(영국 1965)_황후 시리즈_나비(덧없음)
그림은 말보다 더 진실하지만 언어 없는 마음의 독백 같다.
대학 동기인 친구는 불과 몇 해 전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 늘 나보다 밝아 웃음이 많았고 만남에 적극적이었다. 우리 대화는 가볍지 않은 일상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들로 채워지곤 했다. 우린 "개명"이란 동일한 목표를 품고 철학관을 찾았다.
MZ 같은 새 이름을 받은 친구는 민증을 바꿨다. 그러나 내겐 개명을 하면 그 이름에 대한 새로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무서운 전언을 받아 목표를 내다 버렸다. 새 이름을 얻은 친구의 죽음은 내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다. 그 후 몇 달 동안, 캠퍼스가 붉었다. 떠올릴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애가 몸을 잠식했다.
동기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면 자꾸만 어설프게 끊겼다.
"너, 놀랐구나!"
"어… 너무 급작스러워서."
"믿기지 않아. 지병이 있었어?"
"아니, 방지턱처럼 갑자기 튀어 오른 거야."
감정의 일부만 건드린 말이 마음의 무게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어느 날, 우연히 아틀리에를 만나 스케치북을 펼쳤다. 미술에 소질이 있지 도 않았지만, 무언가 그려야 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붓을 들고, 친구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주 갔던 공원, 낡은 자전거, 활기찬 음성이 들릴 것 같은 벤치 그림은 서툴렀다. 색은 조화롭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상실의 감정이 새 나가는 것처럼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슬프다"거나 "그립다"는 낱말에 갇힌 것보다 그림으로 담은 그의 자전거 바퀴 강가와 나무와 풀이 흔들리던 순간의 감정을 담을 수 있었다. 내 마음을 훼손하지 않은 채로 미처 인지하지 못한 기억까지 붓끝이 쓰다듬듯 터치했다.
고장 난 마음을 그림이 더 많이 담아낼까? 말은 선형적이다. 낱말을 이어 감정을 보여주다 보면, 복합적인 층이 그 틀에 갇혀버린다.
상실은 "슬픔"이나 "그리움"으로만 정의할 수가 없었다. 새록새록 돋아나는 추억, 전하지 못한 말들, 공허가 뒤섞인 묘한 감정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이기 쉽지 않았다.
그림은 비선형적이다. 캔버스 위에 색, 형태, 공간이 동시에 그 감정의 전체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그린 추억이 깃든 그림엔 친구의 웃음, 음성, 그의 공백의 고요가 공존했나 보다.
해석의 여지를 남긴 그림을 말없이 바라보던 동기들이
"CW의 에너지가 느껴져!"
라고 말했다. 말로 설명했을 땐 나오지 않던 반응이었다. 그림은 보는 타자의 마음에도 제대로 전달되었다.
모든 마음을 그림이 말보다 더 잘 표현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실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은 그림이 더 전달될 수도 있다. 내가 그린 서툰 그림이 친구를 잃은 슬픔을 온전히 치유해주지는 못했어도 환부를 소독하고, 잃어버린 추억 조각을 다시 붙여주었다. 상실의 마음을 파내지 않아 더 이해할 수 있는 창이 되었다.
서툴러도 괜찮은 캔버스가 받아낸 상실감이 말보다 더 솔직한 속내로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