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엄마의 자기 고백
아, 이쯤 되니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가짜 뉴스'가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그래도 염치가 있는 사람으로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자백하려고 한다. 내가 그리 높은 점수의 엄마는 아니라고.
이상한 '아싸' 기질을 지닌 나는 아이를 낳기 전, 그 흔한 '별그램'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선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고, 사진을 찍는 취미도 없을뿐더러 수기로 일기를 쓰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 땐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에게 꼭 필요한 정보는 다름 아닌 '공구'였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자, 나는 우리 아이에게 예쁜 옷을 사주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런데 유니크하면서도 색감 배치가 환상적인 옷들은 모두 온라인 세상에 모여있었다. 그런 쪽에 재능도 능력도 없는 나는 한참을 기웃대다가, 일명 '손 들고 줄 서기'를 해 가며 주문한 지 무려 한 달 만에 바지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역시! 너무 예쁘잖아. 감탄도 잠시. 여기에 입을 윗도리도 사야 해. 아, 근데 이런 스타일에 어울릴 머리를 내가 못 묶잖아.'하고 좌절했다.
더 큰 현타는 아이가 그 바지를 거부했을 때 왔다. 우리 아이는 당시 바지 고무줄의 강도에 매우 민감했는데, (예민한 아이가 옷에 어떤 부분으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지, 보통 엄마들은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엄청난 수고로 획득한 그 영롱한 바지는 결국 간택되지 못했다. 소심한 나는 반품이나 환불과 같은 과정은 검토해 보지도 못하고, 어설픈 솜씨로 그 바지의 고무줄을 수선해 아이 눈치를 보며 몇 번 입혔음을 고백한다.
다른 분야는 또 어떤가. 아이가 이것저것 그려달라는 시기에 '기린'을 그렸더니, 아이는 그것은 기린이 아니라며 울부짖었다. 고민이 있으면 '책'에 매달리는 쪽이라, '쉽게 그릴 수 있어요!'류의 책을 사서 보고 그렸건만 왜 뭔가 항상 '모지란(!) 기린'이 완성되는 것이냐.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아이 친구 엄마가 정말 대충 일필휘지로 그린 사자의 갈기가 너무도 살아있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보다가 '우리 아이는 꼭 미술 학원을 보낼 거야.'라는 결론으로 마무리했다면 내가 얼마나 못난 엄마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리'쪽은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 차마 모든 사실을 자세히 적을 수 없을 수준이다. 난 메인 요리는 어찌 저지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만드는 축에 속하지만, 거의 똥 손에 가깝다. 일단 나는 김밥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아이가 좋아하는 재료만 넣어서 하나하나 진짜 작은 꼬마김밥이나 간신히 싸는 정도다. 재료 하나하나를 준비하는 그 귀찮음을 나의 사랑으로 아직 넘어서지 못했다. 대체 '인스타'에 돌고 도는 그 엄청난 '좋아요 도시락'들을 만든 엄마들은 누구시죠?
그러던 어느 날, 내 친구가 초등 아이 도시락을 쌌다고 사진을 보내줬는데 그것이 또 나에게 자괴감을 주었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내가 '너무 대단하다'라고 거듭 말하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에이, 야. 나는 근데 너처럼은 못해."
친구가 말하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라, 아이에게 평소 부드럽게 말하고 칭찬도 많이 해주는 편이었다. 반면, 친구는 그런 말투는 너무 낯간지럽다며 잘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또한 엄마들의 성향 차이라며, 친구는 나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이 세상에 완벽한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온 힘을 다해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고, 그 행복을 찍어 남기는 것일 테다.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말자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그리고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모양의 유부초밥을 먹으며 '엄마 최고'라고 엄지를 추켜올려주는 딸아이를 보며, 이 얼마나 쉬운 시험인가 생각한다. 내 방식대로 아이를 사랑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아이는 늘 '만점'을 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