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서 엄마의 세월을 이해하기
이제 막 칠순이 되신 필자의 엄마는 소위 ‘센 여자’다. 하지만 원래부터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었다. 4남매의 막내로 오빠들의 예쁨을 독차지하며 자란 엄마는 혼기가 꽉 차 중매 시장에 나오게 되었고, 얼굴은 다소 반반했던(?) 아빠를 만나 세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그렇게 변해 버렸던 것이다. 적어도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엄마는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를 입고 수제 피자를 만들어 주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엄마를 변화시킨 것은 대체 어떤 세월이었을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빠의 임종을 마치고 엄마는 큰 딸 내외의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오열을 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차분해진 엄마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배우자의 죽음을 전했다. 그 목소리가 놀랍도록 담담해서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몇 번의 통화를 마친 엄마가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남편을 보내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사이가 좋은 부부들이 사별하면 그 고통이 엄청나겠어.”
엄마의 말에 ‘남편과 나에게 사이좋게 지내지 말라고 하는 말이냐’며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빠의 투병 기간 동안 엄마는 종종 크게 분노했는데, ‘젊을 때도 그렇게 고생을 시키더니 마지막 죽음마저 나에게 다 넘기고 간다.’는 게 주 골자였다. 나는 당시 곧 아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내 슬픔에만 집중한 나머지 자주 울었는데, 전화를 걸어 분노를 쏟아내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참.
그런데 결혼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런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며,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굳이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만 싸질러 놓고, 가정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사람’이었던 아빠가 엄마는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누구나 힘들었던 IMF시절이었지만, 연대보증으로 그 많던 재산과 아파트까지 날리고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월세방 한 칸으로 세간살이를 옮겨야 했을 땐 얼마나 참담했을까. 아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세 아이의 끼니를 위해 자존심 다 버리고 노점상을 해야 했을 때, 엄마는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종종 지금의 남편이 아빠와 같이 행동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본다. 엄마는 아빠에 대한 고충을 주로 큰 딸인 나에게 토로하는 편이었는데, 그 모든 상황을 딸로서 받아들이는 것과 여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홀로 그 세월을 지켜낸 엄마가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그 시간 속의 엄마가 안쓰러웠다. 내가 엄마였다면, 정말 아이들만 보고 그렇게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내가 아내였다면, 그래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밥상을 차리고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세월이 흘러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는 더더 강해졌고, 반대로 아빠는 점점 약해졌다. 희끗희끗 새하얘진 머리로 엄마의 말에 꼼짝도 못 하는 아빠가 안타까웠던 날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분이 조금씩 균형을 맞추시는 것처럼 보였다. 평생을 지지고 볶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장성한 아이 셋을 키워낸 동지’, 그리고 ‘의리로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사이’라고 하면 좀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을 모두 독립시키고 그렇게 두 분이서 함께 계시는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은 너무 야속하다.
아빠를 추억하며 늘 투덜대는 엄마지만, 기일과 명절에는 가장 먼저 제사 음식을 챙기고 납골당에 갈 시간을 물어오신다. 그것이 엄마가 아빠를 애도하는 방식이겠다. 평소 아빠가 편하다며 즐겨 입었던 옷가지를 골라 가장 먼저 태워드리는 일, 제사상에 아빠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비빔국수를 올리는 일. 그리고 열심히 건강 관리를 하며 자녀들의 신상을 살피는 일까지. 엄마의 남은 시간에는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