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부부의 루틴 아닌 루틴
나는 2015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비슷하게 결혼했던 나의 지인들은 결혼 후 1년쯤에는 수줍은 얼굴로 '저희 임신했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결혼 후 임신'은 무슨 당연한 공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삼 남매의 첫째 딸이었는데, 엄마는 늘 원치도 않았는데 아이를 셋이나 낳게 되었다며 푸념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임신'이 '어려운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결혼 후 사이좋게(?)만 지내면 곧 우리에게 아기가 찾아와 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고, 슬슬 조급해진 것은 결혼 후 2년이 다 되어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당시 극심한 불안증상으로 퇴사 후, 임신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잠시 '무직'상태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던 시기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소위 난임부부들의 첫 단계에 들어선 상태였다. 나는 매주 홀로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했고, 의사에게 정확한 날(배란일)을 받아 남편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힘들게 과배란 약까지 먹고 지정일을 여러 번 이야기해도, 남편은 당일 회식을 하거나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는 '아이를 원한다'면서도 '숙제'를 성실히 하지 않는 남편에게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 남편은 우리가 난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나는 회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도 못한 '인생의 패배자'라는 타이틀을 얼른 '엄마'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참 많이도 부딪혔다. 동굴 속에 들어가는 남편을 몇 번이나 끌고 나와야 했고,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아기는 찾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나가떨어졌다. 매달 계속되는 일명 ‘혹시’로 시작되는 기대와 실망, 그리고 버려지는 임신테스트기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내가 지쳐갔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다시 새로운 직장을 구했고 우리는 임신에 관심이 없는 부부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이번엔 조용히 기다리시던 시댁에서 오해를 하셨다. 우리가 ‘딩크족’을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조심스레 물어보시기까지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까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야속했다. 나는 그즈음 지나가던 아이만 봐도 눈물이 핑 돌았는데, 남들에게는 쉬워 보이는 일이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 같아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우리가 갖지 '못'하는 아기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다니, 억울하다면 과한 표현이려나.
이후, 남편과 함께 난임시술을 시작할 때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한없이 높아 보이던 산부인과의 문턱을 넘고, 그 유명한 '정자체취방'을 거쳐 우리는 드디어 '자연임신이 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데 남편은 또다시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동안 남편은 우울해했지만, 나는 뭔가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다. ‘이제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다!'는 희망도 피어올랐다. 이후의 시술과정은 나에게 또 다른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남들에겐 간단한 과정이 나에게는 너무도 길고 험난했기에, 지금도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갑갑하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 그 시간이 아무 쓸모도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이 시기를 거치며 우리 부부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에게 보이기 싫은 못난 모습, 조금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대화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는 서로의 생각 차이를 조금은 쉽게 인정하고,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난임시술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이 조금 있었나 싶은데(우리 남편만 그런 걸지도.) 요즘은 정말 흔해서 이게 좋은 현상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과정으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른 무엇이 중하겠는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가 우리에게 온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