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을 대비할 순 없어’를 받아들이는 과정
조금 비관적인 아이였던 나는, 엄마 아빠 두 분이서 차를 타고 멀리라도 가시는 날엔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와 같은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40대가 된 지금도 이런 걱정을 했던 기억은 선명한데, 나는 요즘 이러한 모습들을 ‘불안’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곤 한다.
올해 초, 재택근무로만 일을 하던 내가 출퇴근을 하기로 결정한 직후 내 머릿속은 실로 복잡했다. 온종일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느라, 쉴 새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출근 시간에 맞춰 한 번, 퇴근 시간에 맞춰 한 번, 가기로 한 직장에 아이 등하원까지 포함하여 시범 삼아 가 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다 가능한지 확인 또 확인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초조해졌다. 또다시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다 준비해도, 새롭게 생기는 걱정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어떡하지?’ ‘1시간 거리여서, 내가 달려와도 한참인데.’ ‘갑자기 원에서 전염병이 돌면?’
시댁이나 친정의 도움을 일절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맞벌이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라, 그 자체가 나에겐 엄청난 불안이었던 것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실전’이었다. 실제로 등하원과 출퇴근을 시작하자, 몸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결국은 ‘이게 되네?’가 되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겪은 뒤, 나는 내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것은 다 준비하고 계획하려 했다. 이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님에도.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심지어 ‘엄마 아빠의 죽음’까지 대비하려고 했던 걸까. 물론 머리로는 알겠다. 세상 모든 일을 다 대비할 순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나 자신이 너무 유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또는 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조금은 예상하고 대비하고 싶어진다. 내가 조금만 더 물속에서 발을 구르면, 저 깊은 물속까지 가라앉지는 않을 것만 같은 것이다.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아무리 준비해도 결국은 준비하지 않은 일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이 ‘삶’이란 걸. 그리고 불안을 잘 다루는 방법은 ‘삶’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이제 이다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어떤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것이려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에 미리 밝혀 두겠다. 나는 ‘신경정신과’라는 곳의 허들은 아직 넘지 못한 ‘쪼렙’이다. 그럼에도 한 번은 울면서, 한 번은 호기심에 들어선 상담센터에서 ‘불안이 매우 높은 기질’이라는 평가 아닌 평가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불안이 올라오면, ‘그것이 시작되었다’ 정도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므로, 이런 순간들이 찾아오는 횟수를 줄이려고 계속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노력은 평생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