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논리로 가를 수 없는 ‘인간이라면...’과 같은 진리
나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20대에 막 투표권이 생겼을 때에는 아빠께 ‘누구 뽑아요?’라고 묻고 소중한 1표를 그대로 행사했을 정도로. 다만, 아이를 낳고 조금 정기적으로 뉴스를 보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취향처럼 한쪽 노선으로 미세하게 기울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쉽게 꺼내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으니,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 터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날의 승자였다. 아이를 재우느라 10시 전에 잠이 들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음 날 개운하게 잠에서 깼다. 그런데 평소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남동생이 밤사이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그 문자 속에 있는 ‘계엄’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생경했다. 나는 그 단어가 주는 거대한 두려움을 바로 느끼지는 못했는데, 아이와 평소처럼 등원 인사를 하고 오른 출근길에서야 모든 사태를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저 2024년에 살고 있던 대한민국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 벌어도 벌어도 밑천이 드러나니 ‘참 힘들다’라고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비상’이라고 칭할 만한 엄청난 ‘위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국회나 국감에서 매번 싸우고 드잡이를 하는데, 여와 야가 바뀌기만 한 것이지 맨날 보는 그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며 생각한 것이 그날 그 사태라니.
우리는 5살 아이에게도 가르친다. 상대방이 너를 괴롭혔다고 해서 너도 똑같이 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되는 거라고. 이 단순한 진리가 왜 높은 사람에게는 와닿지 않았던 걸까. 상대방을 만나고 이야기해서, 본인이 하나는 잃더라도 몇 개는 얻어서 한 나라의 대통령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던 걸까.
나는 그 답 또한 ‘사람’에게서 찾아보려 한다. 바야흐로 우리는 원하는 내용의 콘텐츠를 직접 찾아 한 손에 넣어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찾아서 그쪽의 정보만을 받아들인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가 불편하고 싫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점점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는 시간, 듣기 싫은 것을 들어야 하는 관계를 참아내는 ‘조절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도 이럴 진데, 그 높은 곳에 있는 분이 오죽했을까.
‘꼰대’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만’이 단단해져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꼰대’라는 미운 말을 붙인다. 나도 이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종종 사용한다. 다른 쪽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자기 생각에 갇혀 저 어느 한쪽으로 내달리려는 친구에게 ‘정신 차려!’하며 선빵을 날려줄 때 이만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꼰대 아냐?!'라는 말을 해 줄 소중한 친구가 없었던 걸까. 아니, 아니지. 그런 친구를 곁에 두려면 적어도 상대방의 의견에 완벽히 동의하진 않더라도, '그럴 수 있어!'정도는 할 수 있는 너른 마음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맘에 쏙 드는 콘텐츠를 찾는 시간을 조금 떼어 마음의 너비를 키우는데 덧붙여본다.
feat. ‘그럴 수 있어!’ 양희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