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잘 헤어지는 법
나는 작년 봄, 부친상을 당했다. 모든 게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당장에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에만 급급했는데, 아직도 이어지는 그 여파에 한 번쯤 그 당시의 일을 기록해보고 싶었다.
췌장암이었다. 평소 병원 가는 것에 매우 인색했던 아버지가 배가 아프다며 찾아간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는 소식에, 나는 초조하게 그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이미 다른 기관에까지 전이되어 수술도 불가능하다며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는 그 사실을 믿지 않으시는 건지, 믿고 싶지 않으신 건지 몇 번의 항암만 거치면 수술을 할 수 있다며 하던 일도 놓지 않으셨다. 보험도 일절 되지 않는다는 신약까지, 4차의 항암이 이어지는 동안 아빠는 몰라보게 수척해지셨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터에 나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빠의 마지막 삶의 끈이었을까. 암에 걸린 사람이 무슨 일을 하냐며 야박하게 굴던 동료에 의해 일자리를 잃고 난 후, 아빠는 그저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운전도 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엄마가 일하러 나가는 주말에 동생들과 순번을 정해 아빠의 식사와 약을 챙기는 것뿐이었다.
아빠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뚝뚝, 무관심과 같은 단어만 생각날 정도로 다정한 분은 아니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어린 날의 우리에게 아빠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요 근래 아빠는 많이 변하고 계셨다. 특히, 손녀가 태어난 이후에는 ‘아빠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하며 놀라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속절없이 눈물이 계속 났다. 빨래를 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왈칵왈칵 감정이 복받쳤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아빠의 눈을 마주 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이 사그라드는 동안, 일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당시 일정에 맞춰 작업을 해서 보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울다가도 아빠의 식사를 챙기다가도 그 일을 해서 보내야 했다. 5살 아이의 등원과 하원, 육아 또한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엄마의 감정을 다독이는 일까지. 엄마는 당시 하룻밤 사이에 분노와 좌절, 슬픔과 현실적인 문제 등을 오가며 감정이 널을 뛰었는데 그걸 받아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정말이지, 평생 가장 빠르게 흘러갔던 6개월이었다.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시간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열이 지나간 장례식장 한켠에서, 가족외식을 하면 1등으로 드시고 계산을 한 뒤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릴 정도로 급한 성미의 아버지다운 마지막이라며 평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장례식에서는 그저 슬픔만을 느꼈었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되고 보니 장례식장은 단지 죽음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남은 자들의 삶'에 관한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빠의 하나뿐인 손녀는 그곳에서 신발 집게를 장난감 삼아, 쑥스러울 때는 엄마의 상복 치마에 숨으며, 낮잠 이불 안에서 잠이 들었다.
장례가 끝난 직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몇 년 전 어머니를 잃은 친한 친구에게 '그때는 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고백한 일이었다. 베프란답시고, 그 마음을 이해한 양 굴었는데 이 일련의 과정은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내가 온전히 그 죽음을 마주했음에도 가끔씩은 아빠가 아직 살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본가에 들어서서 아빠의 사진을 보면 한동안은 계속 눈물이 났다.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에 한참을 허우적댔는데, 최근에는 조금은 다른 이유로 아빠를 떠올린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가 점점 아빠를 닮아감을 느낀 것이다. 딸인 내가 아빠를 닮는 것이 뭐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얼굴 생김새 말고 살아가는 방식과 그 생각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어떨 때는 내가 무척이나 싫어했던 아빠의 행동,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말들이 마치 조금은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날이 생겼던 것이다. 이 지난하게 이어지는 삶을 대하는 아빠의 태도가 이해가 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다.
딸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던 아빠가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봐라'는 말을 하셨다는 소리에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그 말은 어쩌면 아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 못해 참으로 아쉽구나.'라는 소회는 아니었을까. 내가 감히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빠와 나의 성향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용기'가 없는 성향이니까.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마다, 이제는 떠올릴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다.
아빠. 저는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며 살게요. 그래서 먼 훗날 아빠를 만나면 조잘조잘 다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