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5. 멍을 때리다가 불멍까지

잠깐 숨을 돌리고 싶어요.

by 은호씨

사람 일이란 게 참 얄궂다. 꼭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에 비가 내리고, 일주일에 단 하루 눈화장을 빼먹은 날에 전남친을 마주친다. 세탁기가 고장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냉장고에 물이 줄줄 새고, 아이가 독감에 걸리면 순차적으로 아빠, 엄마가 고열이 난다. 힘들고 바쁜 일들은 좀 순차적으로 터져주면 좋으련만.


회사 일도 그렇다. 이래 저래 집안 행사가 많은 주면 꼭 일도 바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남편의 생일과 이사 준비가 이어지는 와중에 회사에서도 일이 많았다. 안그래도 월초와 월말이 바쁜 일인데, 연초와 연말까지 붙었으니 말 다했지. 거기다 퇴사하는 인원까지.

마음은 바쁜데, 거래처에서 서류를 받지 못해 일이 착착 진행되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데도 심장이 팔딱팔딱 뛴다. 나는 이상하게 바쁘면 불안하다. 이 마음을 굳이 풀어서 표현하자면, 뭔가 엄청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몰아쳐서 불안해.


나에겐 바쁜 하루 일과 중에 ‘심심풀이 땅콩’ 내용의 메신저를 보낼 수 있는 편한 친구가 하나 있다. 내가 쓰레기처럼 감정을 뭉쳐서 휙 던져도 무심하게 받아주고 그걸 심지어 예쁘게 포장해 주는 친구. 그녀에게 지금 이 불안한 마음을 고백했더니, 친구는 오히려 아무 일이 없어서 가만히 있을 때 불안하단다.


평소에도 나와 참 다르다고 생각하는 친구인데, 또 한 번 느낀다. 정말 다르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의 이 불안은 ‘멍’ 하니 조용히 혼자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서 오는 불안이었다. 나에게 ‘멍 때리는 시간’은 힐링의 시간이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등산을 좋아하진 않지만 푸른 숲을 좋아한다. 멍 때릴 때 보기 좋은 배경은 ‘숲’ 만한 게 없다. 언젠가 통창이 있고 뷰가 산’인 집을 보았는데, 정말 부러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커피 잔을 들고 그 초록으로 가득 찬 창을 멍하니 바라볼 수만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겠다 싶어서.


‘멍 때리기 대회’도 있다는 걸 보면, 이 행위는 분명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약간 운동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주기적으로 해주면 좋을 ‘뇌 이완 운동’이랄까. 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흘러가는 요즘, 나는 그냥 아무 때나 멍을 때린다. 너무 뜬금없이 ‘멍’ 하니 있었더니 ‘남편의 걱정’이라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지만.


나는 그저 재충전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만이라도, 의도적으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하찮은 일일지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하고 싶다. 그렇게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다.


여행을 힘들어하는 내가 못 이기는 척 캠핑장에 따라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 ‘멍 때리기’의 공이 컸다. 멍의 또 다른 세계인 ‘불멍’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불꽃의 열기, 아이의 최애템이 된 오로라 가루(!)의 황홀함.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왜 ‘방화범’이 생기는지 조금 이해하고 말았다.


오늘도 나는 핸드폰에 고개를 두려다가, 차라리 지하철 멍 때리기를 선택한다. 시선의 위치는 조금 주의해야 한다. 몇몇 사람들의 오해를 부를 수 있으니까. ‘멍-’ 생각을 잠시 멈추었는데, 금세 그 사이를 비집고 할 일이 뿅 들어서고 만다. 아, 좀 더 쉬고 싶은데. 곧 다가올 딸아이 생일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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