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호5. 싫고 아쉬운 소리

그렇게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by 은호씨

누군가는 요즘 아이들이 유사 이래 가장 행복한 세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가정마다 아이가 많아봤자 하나 둘이고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들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면 어른들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사주지 못해 안달이 난다. 고작 7년을 산 우리 아이도 자신이 양가 유일한 손녀였던 시절을 종종 그리워할 정도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요새 아이들이 조금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땅따먹기 판을 슉슉 그릴 흙으로 된 땅도 없고, 친구들과 방과 후 참새방앗간처럼 들를 동네 문구점도 없어졌으니 말이다. 인건비가 무서워 우후죽순 생긴 무인 판매점은 오히려 아이들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우리 때는 엄마가 심부름 하나 했다고 천 원, 이천 원만 주셔도 참 행복했다. 나는 돈이 생기면 그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곤 했는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 문구점의 부부 사장님은 참 다정하셨다. 그런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나에겐 이때부터 지금까지 못 고치는 불치병이 하나 있다.


지난번에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한 탱탱볼을 사겠다고 달려간 문구점에서 그 물건이 없어도, 빈 손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눈치 보는 병’이 바로 그것이다. 만에 하나, 문구점에 사람이 좀 있으면 몰래 나오는 걸 시도라도 해볼 텐데 나밖에 없으면 절대 그냥 나올 수가 없다. 내 뒤통수에 꽂힐 기대에 찬 사장님들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달까. 난 기어코 막대사탕이라도 하나 사고 만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기가 안 좋아선지 회사에 쓸 달력이 당최 들어오질 않아서 문구점에 사러 갔는데 너무 비쌌던 거다. ‘달력 어디 있어요?’라고 직원에게 묻기까지 하면서 찾았는데, 너무 비싸서 달력을 못 산 나는 기어이 핑크색 형광펜을 하나 샀다. 마흔을 넘기고도 진짜 난 왜 이러는가.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내게 말했다.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이제는 아이를 위해서 떨어진 포크를 다시 하나 더 달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며,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불이익을 당한 것 같으면 안면몰수하고 적어도 물어는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일일이 모든 상황에서 쌈닭이 되란 게 아니라, 할 말은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아주 바보는 아니다. 다만, 쓸데없이 똑 부러진 남편을 만난 덕분에 난 한동안 그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결혼 준비를 하며 가전, 가구 등을 살 때마다 꼼꼼히 비교하고 한 푼 두 푼 잘 깎는 남편을 보며 나는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곤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물건 값을 깎아본 적이 없다. 그분들도 남는 게 있어야지. 여보.


살면서 하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싫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자유’는 정말 소수만의 특권일 것이다. 게다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상황은 계속 달라진다. 어제까지의 갑이 내일 을이 될 수도 있다. 아이를 낳기 전의 나는 ‘싫고 아쉬운 소리’를 피하며 손해를 보고 살았지만, 아이 엄마가 된 나는 이제 그러면 안 되었다.


아이를 낳은 후, 나는 나름의 소소한 미션을 해내고 있다. 아이를 위해 먼저 다른 아이 엄마에게 너스레를 떨며 다가가기도 하고, 원하는 물건이 없으면 ‘아이가 찾는 물건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하며 가게를 나서기도 한다. 내 아이가 나의 답답한 모습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뭉게뭉게 용기가 피어오른다.


하나씩 도장 깨기를 하던 나는 최근 회사에도 내 기준에서는 엄청난 ‘아쉬운 소리’를 남겼다.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까. 두구두구- 초1 아이 입학을 앞두고 난 이 작은 업체에서 육아휴직을 얻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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