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배 꼬여 꽈배기가 되었던 날의 기록
작년 이맘때, 내 눈을 사로잡았던 ‘쇼츠’가 하나 있었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달려 나와 탔던 출근길 버스 안에서였다. 그날도 나는 아이에게 아침이랍시고, 간신히 빵 쪼가리 하나를 건넸을 뿐이었다. 내 아침을 출근 후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대체한 게, 언제부터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주 가끔 나보다 먼저 퇴근한 남편은 아이와의 아침 사투가 고스란히 남겨진 집 안 상태를 빗대어 ‘도둑이 들었다.’고 표현하곤 했다. 정말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다.
집 청소를 해드립니다. 단돈 2만 원!
신종 우렁각시인 모양이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동영상 변환에 익숙지 않은 내가 제대로 파악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직관적인 쇼츠의 특성으로 대충 파악했을 때, ‘당신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마치 새집처럼(!) 청소를 해주겠다.’는 서비스로 보였다. 그것도 단돈 2만 원에!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눈살이 찌푸려졌다. 우선 ‘작고 자잘한 노동들이 외주화’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안 그래도 세상에 모든 일들이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삶을 꾸려 간다면 꼭 해야 할 식사 준비, 청소, 분리수거 등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그 노동의 가치는 점점 그 값어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꽤나 급격하게.
물론 내가 타인의 노동을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애초에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장보기도 어려워 바로 문 앞까지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새벽 택배를 이용하고 있었고, 집 근처의 오래된 반찬 가게에서는 명실상부한 VIP였다. 물론 그 솜씨 좋은 사장님의 가게에는 실제 포인트 점수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일하고 있는 엄마’라서 그렇다고 누군가가 대변을 해준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실상은 핑계에 가까웠다. 나는 아이의 이유식은 손수 만들었지만, 되려 아이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또다시 남의 손에 기대었다. 한 끼 밥상을 차리면서 아이 반찬과 어른 반찬을 따로 만들기엔 내 몸뚱이는 너무 하찮았다. 마침 호텔에서 일했다는 셰프님이 근처에서 창업을 해주셔서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혹자는 이런 서비스나 재화를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밀키트’를 구입하며 항상 그렇게 합리화했으니까. 게다가 거동이 어려우신 분이거나 특수한 상황에 처한 경우 ‘최첨단 우렁각시’나 ‘분리수거 서비스’ 등이 꼭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었을까. 이런 서비스를 소비하며 느꼈던 마음 한 편의 찝찝함은.
한 사람의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노동들이 있다. 적어도 두 끼의 식사, 식사를 하고 나면 반드시(!) 발생하는 설거지, 밖에 나가 일을 한다면/학교에 간다면 입어야 할 옷가지를 빠는 일,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며 계속 생기는 다양한 쓰레기들. (뭔가를 시켜먹으면 쓰레기는 더 발생한다!) 내가 숨을 쉬며 살아가기만 해도 무수히 많은 노동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인간은 먹으면 싸기 마련이고, 그 뒤처리도 본인 몫이 아닌가!
나에 얽힌 모든 노동들을, 나는 내가 하고 싶다. 감히 나는 이것을 ‘자존감’과 연결 짓고 싶다. 가능하다면 나는 내 아이도 내가 케어하고 싶고, 가족이 먹을 음식도 손수 만들고 싶으며, 그들의 옷도 내가 빨아 널고 싶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내 힘으로 치우고 싶다는 말이다. 나의 노동이 2만 원보다 더 비싸고 힘들지라도. 나는 ‘내 손’으로 하고 싶다.
그래서 진심으로 퇴근 후에도 내 ‘자존’을 지킬 수 있는 그 체력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불어, 그 ‘시간’도 나에게 허락되기를 바란다. 꾸역꾸역 울면서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가정이 제대로 된 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양의 가사 노동이 필요하고, 그 모든 것은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손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AI 시대가 된다 한들, 삶에서 파생되는 노동은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